스틸 선셋 - 4
23-03-01 15:30

 

 

스틸 선셋

 

 

 

* 세계관 날조가 있습니다.

 

 

 

 

 

 

기다릴게.

몇 달이든 몇 년이든.

그게 뭐 그리 중요하겠어.

어차피 내 시간은 아랑곳 않고 계속 흘러갈 텐데.*

 

 

 

 

 

 

0.

생을 모르는 자는 기념이랄 게 없다. 오랜 기억 끝은 어둠이었으니 깊이 탐하려 든 자는 더 깊은 심연에 빠져 헤어 나올 수 없게 된다는 게 정설이다. 단정하게 내려앉은 머리칼을 팔랑이며 허리에 손을 얹은 이는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코를 찡긋거렸다. 모르면 만들면 되지! 당당한 모습과는 다르게 코엔 돌돌 말린 휴지가 끼워져 있었다. 하얀 휴지의 끝이 붉게 물들었는데도 둘러 앉은 이들 중엔 신경 쓰는 자가 없다. 만류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기억의 시작을 보겠다고 설치다 과부하가 걸렸으니 코피 정도로 멈춘 게 차라리 다행일 것이다.

“이럴 거냐고오. 만들면! 만들면 된다니까?”

“아무 날짜나 정하면 되는 걸 코피까지 흘리냐?”

정확한 지적으로 쏘아붙이는 말에도 그는 꿋꿋했다. 오히려 거슬린다는 듯 휴지 조각을 팽, 뽑아내고는 호쾌하게 소리쳤다.

“바코드에 숫자 있잖아. 그게 기념일인 거지.”

번뜩이는 기발한 생각은 혼자만의 해당 사항이었는지 영 관심을 끌지 못했다. 봐봐. 그럼 너는 4월 22일? 9월 4일? 애매하네. 뭐가 맘에 들어? 첫 번째 시도부터 엉터리다. 어이없게 쳐다보는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연스레 두 번째 시도를 한다. 물어뜯기라도 할 기세로 바코드가 새겨진 목에 집착하는 모습에 기겁을 하고 몸을 털어보지만 얇은 몸은 집요했다. 109-94… 10월 9일인가? 9월 4일? 둘이 숫자가 똑같은 걸 보니 94란 숫자엔 무슨 의미가 있을 것 같은데…… . 숫자를 읽으려 달려들던 호전적인 모습은 간데없이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됐어. 너만 좋은 거 하려고 그러지?”

“아직도 행운의 숫자 같은 걸 믿냐.”

“쟨 그런 거 믿어.”

“오.”

JS-777-77.

어설픈 속내를 들킨 귀 끝이 땅에 버려진 휴지 조각의 색으로 물들었다.

“뭐어 속셈이 없었다곤 말 못 하지만. 있으면 좋을 거 같지 않아? 우린 생일 모르잖아.”

“그런 거 몰라도 되는데.”

“있든 말든 상관없는데 오늘 7월 6일 아냐?”

“뜬금없이 생일에 집착한다 했다. 그렇게 선물이 받고 싶었어? 오냐, 생일빵이다.”

누워서 여유를 부리던 자들이 모두 그에게 쏟아졌다. 그게 아니라고오-! 아니라고 변명을 해보지만 들은 척도 안 하는 덕에 쫓고 쫓기는 술래잡기는 엉망진창이 되었다. 4월 22일, 새로운 날을 받은 자만이 기꺼운 소란에도 끼지 않고 가만히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주황색의 햇살이 얼굴에 쏟아졌지만 찡그리는 기색조차 없다.

오래된 기억이다.

 

 

 

 

 

1.

이승준이 열여섯 번째 타임 워프 끝내고 돌아왔다. 채 석 달을 넘기지 않던 여정은 이제 몇 년 단위는 우습게 느껴질 정도로 길어졌다. 이번엔 몇 년 만이더라. 시간을 가늠해보려 했으나 잘 와닿지 않았다. 시간은 살아있는 사람에게나 흐르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살아있는 게 아닌가? 익숙하게 떠오르는 질문을 무시하고 기록지를 펼쳤다. 정보 공유가 목적이었기에 깔끔하게 전달 내용만을 담아내던 기록지 곳곳엔 작은 낙서들이 자리했다. 아무렇지 않다 생각했는데 기다림이 꽤 지루했나보다. 조만간 지워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페이지를 넘겼다. 이승준의 16번째 타임 워프. 3296일 전. 10년은 넘기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가끔 연락을 받긴 했으나 마지막 연락도 3년 전이었다. 각 세계마다 시간의 흐름이 다르다. 승준에겐 고작 며칠이 효진에겐 몇 년이 될 수도 있었다. 세 자리가 넘어가는 햇수만큼 승준과 효진의 시간이 달라지고 있었다. 마중이라도 갈까 싶어 급하게 옮기던 발걸음이 서서히 멈춘다. 아마 승준은 여기로 올 것이다. 길이 엇갈린단 핑계로 반가움과 희미한 두려움을 눌러냈다. 이번엔 또 어떤 얘기를 가지고 와서 저를 흔들어놓을지. 선량한 나비의 날갯짓에 폭풍을 맞는 건 오롯이 저여야만 했으므로 마음을 가다듬기로 했다. 준비 시간. 이상하다. 우리가 만날 땐 어떤 준비랄 게 필요치 않았었는데.

“효진!”

긴 여행에서 돌아온 사람치곤 표정이 밝다. 빨리 말해주고 싶어 죽겠다는 듯 상기된 얼굴을 보며 나올 말을 짐작했다. 일을 하다 오래 걸린 것 같지는 않고 보나 마나 또 재미있는 일을 지나칠 수 없었던 거겠지. 효진의 생각을 읽은 듯 승준의 흥분이 조금 가라앉았다.

“나 열심히 찾았어. 놀다 늦은 거 아니다? 이번엔 진짜! …찾을 뻔했거든.”

조심성없이 들고 온 걸 조심스레 내려놓으며 승준이 발라당 누웠다. 못내 분한 듯 발이 허공을 휘적였다.

“바닥 차가워.”

“뛰어왔더니 시원하고 좋네, 뭐. 여긴 여전하구나.”

새삼스레 방을 둘러보았다. 여전이라. 여전하긴 했다. 이승준이 이곳을 떠올릴 때 기억과 달라진 게 없으면 좋겠단 마음으로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공간이었다. 바꾼 새 이불 대신 예전에 쓰던 이불을 다시 꺼내놨다는 사실은 굳이 과시하진 않는다. 이승준은 그런 거 몰라도 된다. 침묵을 깬 건 늘 그렇듯 이승준이었다.

이번엔 말이야, 시작부터 운이 좋았어. ‘너’를 만났거든. 눈을 뜨자마자 보인 게 너라서 얼빠진 채로 이름을 불렀는데, 그래! 지금 딱 그 표정! 그 표정으로 날 쳐다보더라니까? 그래도 이번엔 헷갈리진 않았다. 걔는 날 모르더라고. 너도 날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처음엔 낯선 네가 있다는 걸 받아들이는 게 참 힘들었었는데 나도 많이 성장한 듯? 흔적을 좇다가 힘들면 종종 만나러 갈 수 있어서 마음도 편했어. 그래서 그랬나? 단서를 찾았어. 단서라도 잡은 건 처음이잖아. 이 웃기지도 않는 여정을 끝낼 수 있단 생각에 기뻐서 당장 갈 채비를 하는데, 갑자기 네가, 아니 걔가 나를 보러 온 거야. 먼저 찾아온 건 처음이었거든. 와, 효진. 오늘 할 일은 오늘로 끝내는 게 맞는 거 같아. 괜히 미뤘더니 다음 날 아침에 신호기가 고장 난 거 있지. 같이 가기로 한 녀석은 어디서 뭘 하는지 연락도 없고! 무슨 상황인지는 알려줘야 할 거 아냐. 혼자 고치고 나니까 시간이 좀 많이 지났더라고. 수리가 제대로 됐는지도 의문이지만 어쨌든... 이번에도 못 찾았어. 가니까 없더라. 이번엔 찾았다고 말해주고 싶었는데. 아쉬움에 계속 찾다 보니 시간이 너무 지났지 뭐야. 우리 막내도 보고 싶고. 다들 잘 지내고 있으려나. 소식 들은 거 있어?

나른하게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수마도 불러일으킬 만큼 평화를 선사했다. 듣는 이가 효진이 아니었다면 잠에 빠져들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효진은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가 품은 내용이 마냥 반갑지만은 않다. 거슬리는 지점에 대해 몰두했다. 또 눈앞에서 놓쳤다는 거? 이승준이 다시 타임 워프를 시도해야 한다는 거? 다른 애들이랑 연락이 안 된다는 거? 그것도 아니면 역시 내가 모르는 ‘나’인가?

“연락 끊긴 지 좀 됐어. 생체 반응은 이상 없는데 다들 소식이 없어서 바쁜 줄 알았지. 같은 곳으로 간 거 아니었어?”

“…그래? 아니, 우리 이번엔 찢겼거든. 문제가 생겼나 봐. 민균이가 그거 확인하겠다고 돌아갔는데 민균이도 안 왔어?”

“응.”

“…….”

승준이 효진을 빤히 바라봤다.

외로웠겠다. 긴 망설임 끝에 내어놓은 한숨과 같은 속삭임이 위로처럼 다가왔다. 외로웠던가? 곱씹어보지만 와닿진 않는다. 따뜻할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승준은 효진을 꽉 끌어안았다. 온기를 나눠주려는 것 같은 행동에 효진도 모른 척 어깨에 턱을 얹고 눈을 감는다. 먼저 안아놓고 어색해지기라도 한 건지 꼼지락거리던 승준이 효진을 떼어냈다. 떨어진 품이 아쉬웠지만 떨어져 준다. 실패를 털어놓던 때와는 다른 낯을 하고 있었던 탓이다. 선물 상자의 리본을 풀기 직전과도 같은 표정이었다.

“내가 알아낸 게 하나 있는데.”

“뭔데?”

궁금해해줬으면 좋겠다는 눈빛에 효진은 순순히 물었다. 뭘 알아냈든 지금 우리의 상황을 타개할 방법은 없다는 게 자명해 보였으니 별 궁금증도 일지 않았지만 승준이 원하는 것이라면 그 정도는 사소했다. 승준은 꽤 조심스럽게 내려놨던 봉투를 끌어왔다. 네모난 종이 상자 안을 들여다보던 승준이 헉, 망가졌다. 중얼거렸다. 그걸 거칠게 들고 오면서도 안 망가지길 바랐던 건지 승준은 잠시 입을 삐쭉거리다가 또 금방 털어냈다. 이미 발생한 문제보다 눈앞에 직면한 상황에 더 신경 쓰는 게 이승준이었다. 잔뜩 찌그러진 채 효진의 눈앞에 들이민 건 하얀 덩어리였다.

“케이크?”

형체만 간신히 남아 있는 케이크. 하얀 종이판과 구색을 위한 초가 아니었다면 짐작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응. 너 오늘 생일이더라. 어떤 세계에서든 너의 생일은 4월 22일이더라고. 네 바코드 숫자는 역시 생일이었던 게 아닐까? 다른 애들 생일도 물어볼걸 그랬나?”

표시가 있을 목을 더듬어봐도 새겨진 문신이 손끝의 감각으로 느낄 수 있을 리가 없다.

“션이랑 동갑이 아닐까? 한 번밖에 못 만나서 확신할 수 없지만 동갑이긴 했거든. 94가 뭘 의미하는 것 같긴 한데. 숫자에 대해 아는 거 없어?”

아는 게 있을 리가. 422가 생일을 뜻하는 것도 이제야 알았는데. 생일. 그렇구나. 모든 ‘효진’은 4월 22일이 생일이구나. 생일을 알아 온 게 고마우면서도 유치한 마음이 들었다. 그 애들의 생일도 축하해줬으려나 싶은 치졸함.

“생일 축하해.”

“고마워.”

“내년 생일도 같이 있으면 좋겠다!”

“빨리 찾고 돌아와. 같이 보내려면.”

사고를 거치지 않고 뱉은 말의 뜻을 헤아렸을 땐 이미 늦었다. 이미 승준은 웃음을 가득 달고 있었다. 웃어도 해야 할 건 해야 한다는 듯이 웃느라 떨리는 몸으로도 크림을 얼굴에 묻히는 건 좀 어이없었다. 케이크가 못 먹을 정도가 되어서야 승준의 웃음이 그쳤다. 얼굴에 크림을 가득 단 채로.

“빨리 올게.”

하나도 멋있지 않은 모습으로 듬직한 말을 남기고는 다시 다른 세계로 달려갔다.

방 안에 이승준의 흔적은 승준을 위해 꺼내둔 옛 이불뿐이다. 그러게. 나 외로웠나보다. 효진은 이불을 정리했다.

 

 

 

 

 

2.

“네 생일도 알려줘.”

“응?”

승준이 효진의 생일을 알려주고 떠난 뒤 처음 만나는 자리였다. 이번엔 37년. 십 년 단위로 도착하는 메시지로 추정해봤을 때 승준은 그곳에서 고작 몇 달을 보냈을 거였다. 15번의 시도를 하고도 9년이 걸린 지난 여정에서도 겨우 단서 하나만을 발견해냈으니 이번에도 별 소득은 없지 않으려나. 효진은 다른 게 궁금했다. 주기적으로 보고 받는 기계적인 내용 말고, 이승준이. 이제는 아예 소식조차 끊긴 아이들의 소식을 효진에게 어떤 식으로 말을 꺼낼지 고민하던 승준은 머릿속 계획에 죄다 줄을 그었다. 비상등이 켜졌다.

“효지인. 그게 그렇게 궁금했어?”

승준이 효진에게 답삭 안겨 왔다. 이전엔 없던 습관인데 지난 9년, 그리고 이번 몇 달의 시간 안에 생겼다기엔 안기는 모양새가 퍽 자연스럽다. 유치해지려는 자신이 생경했다.

“내 생일은 이미 지났는데. 맞춰 올걸 그랬나?”

“몇 년 만에 돌아왔는지도 모르면서 날짜를 어떻게 맞춰. 내가 챙기면 돼. 언제야?”

날 선 듯한 효진의 말에 승준은 볼을 긁적였다. 나 그래도 엄청 빨리 온 건데. 구차하게 덧붙이려다 관뒀다. 효진이 더 부끄러워하는 것 같아서.

“나는, 음, 7월 7일이더라. 역시 숫자는 생일이었나 봐. 왜? 나 선물 주려고? 내년 생일에 효진이 축하 받고 싶다. 우리 효진이 생일 못 챙긴 게 벌써 몇 번째람. 지겨워지겨워.”

자연스럽게 주제를 넘긴다. 효진은 부러 지적하진 않았다. 다른 애들의 이야기를 묻지 않은 이유도 마찬가지다. 수신기가 제대로 고쳐지지 않았는지 그 뒤로도 연락을 받지 못했다. 세간에 떠도는 언어로 된 정보지를 죄 뒤져봐도 소식 한 줄 찾을 수 없었다. 마치 존재 자체가 삭제된 것처럼 파면 팔수록 혼란스러웠다. 승준의 기록이 업데이트 된 걸 확인했을 땐 한동안 숨 쉬는 것도 잊을 정도였다. 그리고 다시 돌아오기까지 했을 때 효진은 승준이 기적처럼 느껴졌다. 그런 이승준이 먼저 말을 꺼내지 않는다면 그 이유가 있을 거라 짐작했다. 승준은 불확실한 정보를 알려 같이 불안에 빠지기보단 혼자서 해결할 수 있는 데까지 시도해본 후에야 상황을 공유하곤 했다. 같이 하면 좋을 텐데. 효진이 할 수 있는 일은 적어 주먹만 쥐었다. 조만간, 다른 누군가가 맡았던 일을 해야 하게 될 것 같다.

효진은 구석에 숨겨놨던 상자를 꺼냈다. 복잡한 얘기는 다음으로 미뤄도 된다. 짧게 주어진 이 시간이 소중했다. 언젠가 봤던 하얀 덩어리와는 다르게 온전한 모양을 갖춘 케이크였다.

“나도 축하해주고 싶었어. 넌 생일을 궁금해했으니까. 7월이면… 생일까진 반년은 남았겠지만 미리 축하하는 걸로 하자.”

승준은 별 말 없이 미소만 지었다. 올해 생일은 같이 보낸 거네? 놀리듯이 하는 말하는 승준이 오히려 부끄러워했다. 노래를 부르고 촛불을 끄는 과정이 어색하게만 생각되었다. 다른 애들이 있었으면 좀 나았을까. 효진의 자책은 승준의 고맙단 인사에 삼켜졌다. 고마워. 속삭임과 함께 달력의 숫자가 14로 바뀌었다. 이승준이 다시 돌아갈 날짜였다.

 

 

 

 

3.

과학 기술 발전의 과도기에 끼었다. 늦게 태어나서 기회라도 얻었으니 재수가 좋다고 해야 할지, 이르게 태어나서 실험 대상이 되었으니 재수가 없다고 해야 할지 모호했다. 불완전한 인간의 신체를 버리고 기계로 바꿀 수 있는 시대라는 건, 적어도 효진의 생각엔 불행에 더 가까웠다. 인간의 정신을 고철 덩어리에 옮겨낸다는 사실은 어불성설이었으나 인간은 늘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욕망이 강했다. 부, 명예, 더 나아가서는 영생까지. 예로부터 추하게 이어진 영생을 얻기 위한 노력은 기술의 발달로 가능한 듯 보였다. 휴머노이드. 이미 여러 불법적인 방법을 거친 정신 이식 실험은 성공률이 99.9%였고, 알음알음 퍼지는 소문으론 몇몇 살인형에 처한 범죄자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도 성공했다고 했다. 이미 지구-616**의 인구 절반 이상은 휴머노이드로 대체되었다. 효진과 승준은 초창기 모델이었다. 그들은 시범 실험의 대상자였고 시범 실험이어서인지 수술 중 발생한 문제로 인간이었을 때의 기억을 잃었다. 알고 있는 사실이라곤 정신 이식 과정에서 심어진 이 세계의 정보와 눈을 떴을 때 여섯 명이 한 곳에 있었다는 것뿐이다. 왜 시범 실험에 참여하게 되었는지, 인구 대부분이 무사히 성공한 수술이 왜 이들의 기억을 앗아갔는지 모른다. 텅 비어버린 공백에 혼란을 느끼기도 전에 승준이 상황을 정리했다. 내 이름은 이승준이야. 별거 아닌 자기소개가 혼란을 가라앉힌다. 이름. 기억은 잃었어도 존재하는 이유. 그때부터 그들은 친구가 되었다.

기억을 잃은 자들의 공통점은 없었다. 다만 어느 날을 기점으로 더 이상 모습이 보이지 않다가 기억을 잃은 채 나타났다는 것, 그리고 눈을 뜬 이후부터 감시가 따라붙는 것 같다는 것. 아무래도 문제가 될 법한 행동을 시도했던 집단이 아닐까, 추측만 할 뿐이다. 남아있는 기록조차 사라진 듯 없었으니 반동분자 정도가 아니었겠냐며 승준은 만족스러운 듯 웃기나 했다. 이상이 생긴 건 기억이었다. 결여된 부분을 채우고 싶단 욕심. 그리고 어떤 우연으로 이어졌을지 모르는 인연들과 계속 함께 하고 싶다는 생각. 기계로 이루어진 몸에 감정이 생겨난다는 건 생소한 일이다. 무모하단 생각에 반대를 했지만 이승준은 단호했다. 이대로 아무것도 모른 채 살고 싶진 않다나. 모종의 계략에 의해 사라졌을 수도 있는 기억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가설이 맞는다면 이 몸조차 이상한 것일 수도 있다고. 자체적으로 점검했을 땐 이상이 발견되진 않았지만 혹시 모를 일이다. 언제 감정에 문제가 생길지도, 기억에 문제가 생길지도 몰랐다. 오직 칩 하나를 의존해 기억을 백업하고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어쩌다 퍼지게 된 정보인지 출처는 알 수 없지만 폐기된 기억 조각들이 흘러가는 곳이 있다고 했다. 어디로 흘러가는지, 어떤 모양으로 보존되어 있을지, 보존 되어 있을지조차 불분명하지만 그 불확실함에 기대 흩어지기로 했다. 각자의 방식으로 할 일을 끝내면 그때 다시 모이자고. 효진은 이곳에 남겠다고 했다. 다시 모이자는 기약 없는 약속을 불안해한 이승준 때문에 중심점이 되고자 함이다. 기다림은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했다. 이들 중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불법칩으로 시도한 타임 워프로 새로운 평행세계가 무한히 만들어질 것이라고는, 아무도.

 

 

 

 

4.

넓게만 느껴지는 침대에 누워 효진은 생각을 정리했다. 얼마 전 떠났던 이의 소식을 발견했다. 1급 기밀 표시도, 어떤 표식하나 없이 빨간 표식만이 찍힌 문서 하나를 은밀하게 취급하는 걸 보고 빼 온 자료였다. 크리미널 프로파일. 이런 데서 발견할 거라곤 예상도 못했던 터라 효진은 제 움직임이 다 간파당하고 있는 줄 알았다. 누군가가 저를 놀리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이럴 수가 있나? 이미 몇 번이나 읽은 문장을 반복해서 읽었다. 불법칩을 훔쳐 타임 워프를 시도. 이것까진 합의된 내용이다. 불안정한 상태? 이건 들어본 적 없다. 반복적으로 실패? 이것 역시 들어본 적 없다. 그럼 승준의 타임 워프는 대체 몇 번째인 거지? 의문을 해소할 새도 없이 다음 문장에서 시선이 떨어지질 않는다. 낯선 인간의 감정. 효진의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당연하게도 아무런 통증이 느껴지질 않았다. 몇 분이나 그 상태로 있었을까. 효진은 전자 문서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마치 이게 목적이라는 것처럼 티 나는 곳에 잘도 숨겨뒀다. 해킹을 위한 함정이든 혼란을 위해서든 열어봐야 했다. 이성이 날아간 것처럼 구는 게 그들의 목적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이 스쳤지만 이미 실행에 옮긴 뒤였다. 적힌 내용은 이미 알고 있던 내용이었다. 1급 범죄자로 분류되어있는 상태라는 것, 어디서 찍혔는지 모를 흐릿한 여섯 명 각각의 사진, 불법 타임 워프 등. 효진은 크게 개의치 않았던 일이었다. 안 잡힐 자신이 있었고, 만약 발각되더라도 기억이 저장된 칩만 들고 누군가에게든 합류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1급 범죄자로 분류된 이유를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단 게 더 정확했다. 그럴 이유를 고민할 시간에 다음 타임 워프는 어디로 할 것인지나, 기억 보관소에 대한 정보가 더 있는지 세계 곳곳에 문서든, 그림이든, 소문이든 어떤 형태로 흩뿌려졌을지 모를 찌라시 한 조각이라도 긁어모아야 했다. 이 일을 시작한 지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후회라는 걸 했다. 어쩌면 두 번째일 수도 있는 후회를.

-“수많은 과거 여행으로 인하여 멀티유니버스가 생성되면서 타임라인이 엉망이 됨.”

-“기억을 잃기 전과 마찬가지로 타임 워프를 시도함. 목적은 아직 알 수 없음.”

어쩌면 제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수의 타임 워프가 시도되었고 예상을 훨씬 웃도는 멀티유니버스가 생성되었을 수도 있다. 엉망이 된 타임 라인과 더불어 늘어난 평행세계. 연락이 끊긴 넷, 이승준. 잃어버린 기억. 덮어놨던 의심들이 걷잡을 수 없게 불어났다.

 

 

 

 

5.

Whatever can happen, will happen.

불법칩을 입수하기 전 타임 워프에 대해 조사했을 때 지나쳤던 문구가 지금에서야 생각나는 건 왜일까.

 

 

 

 

 

6.

여행은 지루했다. 원래도 활동적인 성격이 아닌데다 쉼, 재충전, 여행에 붙일 수 있는 모든 긍정적인 이유가 결여된 ‘누군가를 찾기 위한 여정’은 피로감만 쌓인다. 처음 만난 이승준은 아주 어린 애였다. 휴머노이드가 생산되지 않은 어느 과거의 시점인 듯 세계는 느리고, 조용하고, 하늘이 깨끗했다. 선명한 주황빛의 노을은 오랜만이었다. 아직은 품이 큰 교복을 입고 맹랑하게 쳐다보는 게 꼭 제가 아는 승준과 닮아 있었다.

“효진이네 형이에요?”

묻는 말까지도. 효진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쓸어내렸다. 처음 봤을 때부터 성체였으니 어린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다. 잘못 왔구나, 하는 생각과 더불어 몰랐던 모습을 발견해서 기쁜 것 같기도 했다. 이미 김효진의 존재를 아는 걸 보니 3월 2일은 지났겠구나. 아직 날짜 동기화 중 표시를 띄우는 멍청한 디바이스를 쳐다보던 효진은 다정하게 무릎을 굽혔다.

“효진이를 알아?”

“같은 반이니까요? 근데 진짜 형이에요?”

“응. 효진이랑 친하게 지내줄래?”

“으음, 알겠어요.”

잠깐 고민하던 어린 승준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다는 인사를 남기고 동기화가 채 끝나기도 전에 다른 곳으로 떠났다.

이승준의 말에 의하면 ‘김효진’과 ‘이승준’이 처음 만나는 날은 3월 2일이라고 했다.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는 말처럼 평행 세계 어디에서든 꼭 발생하는 사건들이 있었다. 예를 들면 생일이나 존재 여부 같은 것들. 거기에 더해 기준은 알 수 없는 특별한 이벤트도. 효진과 승준의 만남 또한 해당하는 일인지 서로의 존재를 처음 인식하는 날은 3월 2일이라고 했다. 나이, 직업, 관계, 그 모든 것을 초월한 사이에서도 관계의 시작이 동일한 날이라는 건 굉장한 일이라고 말하던 승준은 웃었다. 어떤 곳에서 우리는 같이 춤을 추고 노래하는 일을 하고, 어떤 곳에서는 야구라는 스포츠 종목 선수라고도 했고, 또 다른 곳에서는 경찰과 혁명군이라고도 했다. 그리고 어떤 곳에서는 서로에게 총을 겨누는 사이라고도 했다. 하필 첫 타임 워프에서 ‘김효진’이 ‘이승준’을 착각하는 바람에 일어난 일로 이승준은 눈물을 매단 채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나한테 총을 겨눌 수 있냐며 억울함을 호소하는 승준을 달래게 된 효진도 억울했으나 놀람을 진정시키는 게 먼저였다. 칭얼거림을 받아내면서 막연하게 우리가 대립할 수도 있겠구나, 떠오른 생각은 속으로 삼켰다. 타임라인이 엉키고 멀티유니버스가 무분별하게 생성되고 있다는 걸 알게 된 이상 효진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정해놓은 기간까지 연락이 오지 않는다면 효진 또한 뛰어들 작정이었다. 또 다른 혼란을 야기할 수도 있다는 불안보다 이대로 혼자 기다리는 건 더 이상 못 해 먹겠더라. 읽음 확인 처리가 되지 않은 수많은 메시지들 위에 새로운 메시지를 띄웠다. 효진이 늘 머물던 아지트엔 여섯만이 알아볼 수 있는 표식을 남겼다. 혼자 살면서 조금씩 바꿨던 인테리어도 원래대로 돌려놓고 익숙한 듯 낯선 이불도 다시 꺼냈다. 먼지를 털어내면서 불현듯 생각이 스쳤다. 금방 털어버렸다.

 

 

 

 

7.

처음 몇 번은 열심히 기록을 남겼다. 흩어진 이들의 흔적을 쫓는 것도 목적 중 하나였으니 정보 수집도 기록도 꽤 성의를 보였다. 꽤 잘 쓴 기록지는 점점 간략해지더니 종내엔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게 됐다. 너무 많은 정보가 쏟아졌고 그만큼 실패가 쌓였다. 방문했던 곳만 대충 기록하고는 또 다른 곳으로 떠나는 일의 반복이었다. 얼마나 많은 ‘이승준’들을 만났는지 세는 것도 포기했을 무렵.

이승준을 찾았다.

옆엔 익숙하지만 낯선 넷과 …김효진.

이승준은 이곳에서도 익숙한 다섯과 함께였다. 아마 다섯을 모은 것도 이승준이리라. 원래 세계에서의 여섯처럼 이들도 위험한 일을 벌이고 있었다. 예행연습이라도 하는 걸까. 보안 로봇들에 의해 연행되고 있는 이승준의 표정에서 불안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무언가 계획대로 일이 진행되어 아주 만족스러울 때 그걸 드러내지 않으려 일부러 눈에 힘을 주는 버릇은 여전했다. 이승준이 잡혀가고 또 다른 ‘김효진’이 구하러 가고, 보안 로봇들을 해킹해 도시에 반란을 일으킨 이승준은 행복해 보였다. 이제 이 세계는 승준의 바람대로 휴머노이드와 사람이 대립하지 않는 곳이 될 것이다. 이건 효진과 승준의 차이였다. 이승준은 행동 원리는 대의다. 그리고 그 대의는 모든 사람들을 향해 있었다. 김효진의 대의는 오직 이승준이었다. 김효진은 이승준의 대의 안에 포함되어 있을 뿐이다. 알고 있던 사실들이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이미 같이 하고 싶었던 이들은 흩어졌고, 게 중에서도 제일로 쳤던 이승준조차 자꾸 작은 것을 지나치지 못해 새로운 일을 벌이고 만다. 분명 그건 선행일 게 분명한데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흩어진 이들이 그리워서? 아는 얼굴들을 지나치지 못해서 자꾸 이 구성에 집착하는 걸까? 다시 만나자는 말을 지키려고? 하지만 이건 우리가 미래를 약속했던 이들이 아니다. 이승준이 제일 잘 알고 있을 명제다. 그런데 왜. 수많은 타임 워프를 통해 마모되고 깎여나간 감정들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이승준을 기다리고 있는 김효진은 지금 저 ‘김효진’이 아니다. 야구공을 던지던 ‘김효진’ 또한 아니고, 시간을 훔치는 ‘김효진’도, 같이 노래를 부르는 ‘김효진’ 또한 마찬가지다. 이승준에게 ‘김효진’이 많아질수록 김효진의 입지가 점점 작아진다. 돌아오겠노라 약속했던 건 새까맣게 잊은 것 같은 모양새였다. 효진은 자조했다. 잊힌 줄도 모르고 오래된 약속을 붙잡고 있던 꼴이 우습다. 딱 하나 가졌던 것을 잃은 자는 거리낄 게 없다. 도시 해방이라는 큰 프로젝트를 완수해낸 승준은 또 다시 다른 곳으로 떠날 것이다. 어쩌면 효진을 보러 살던 곳에 방문할 수도 있다. 효진은 며칠 전에 해킹한 승준의 디바이스 기록을 살핀다. 승준의 다음 행선지에 지구-616이 뜨는 일은 없었다.

 

 

 

 

 

 

8.

아, 승준아. 네가 나한테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9.

그 뒤로도 승준은 몇 번의 타임 워프를 시도했다. 효진이 타임 워프를 시도한 후로 승준의 행선지 중간에 고향이 뜬 적이 없었다. 메시지를 보내는 일도. 꼭 효진의 존재를 잊은 것처럼 굴었다. 효진은 여전히 초록색 신호를 띄우고 있는 여섯 명의 생체 반응을 살핀다. 다음엔 메시지 창을, 그리고 언젠가 찍었던 여섯의 사진을, 이승준을. 이런 게 다 무슨 소용이지. 그깟 기억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이제 우리가 함께한 시간보다 소식조차 모르게 된 시간이 더 긴데, 이렇게 쉽게 잊을 거면서. 영원을 그렇게나 쉽게 확신하고서는. 결전의 날을 앞두고 웃는 얼굴들에 속이 거슬렸다. 그중에서도 제일 거슬리는 건 역시 죽을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웃는 이승준이다. 이승준의 기억에 문제가 생겼을까 봐, 그래서 자신을 못 알아볼까 봐, 지금의 저 ‘김효진’과 헷갈릴까 봐, 온갖 핑계로 앞에 나서지도 못하는 겁쟁이 같은 모습을 하고 질투나 하는 꼴이 우습다. 그렇지만 계획을 철회할 생각은 없다. 승준이 저를 위해 준비하기라도 한 것처럼 오늘은 3월 1일이었다. 승준이 제게 준 것 같은 기회를 날릴 생각은 없었다. 이승준의 생각은 다를 수도 있겠지만 그게 중요한가? 그 어느 날처럼 주먹을 쥐었다. 손톱이 살을 파고드는 통증이 느껴졌다.

쫓기는 신세가 된 승준은 우주로의 탈출 계획을 세웠다. 둘, 둘, 하나, 하나. 먼저 떠나 개인행동을 하기로 한 둘이 우주복을 입고 나간 후 둘씩 나뉘었던 무리가 한 명의 자폭으로 합쳐졌다. 수고가 줄었네. 효진은 승준이 탄 우주선의 방향을 확인했다. 승준이 목적지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아챘을까? 얼음만이 가득한 허허벌판에 떨어지게 된 승준이 지을 표정이 궁금했다.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표정을 상상하다 빨간색 버튼을 눌렀다. 생명유지장치 고장 정도로는 무력화시킬 수 없는 걸 알아 과하게 망가뜨리는 쪽을 택했다. 엉망이 된 우주선 안으로 들어가자 잔해들이 밟혀 부서지는 소리가 비명처럼 울린다. 쓰러진 사람은 셋, 게 중 하나는 머리를 노랗게 물들인 ‘김효진’이었다. 마음을 숨길 생각도 없이 이승준 옆에서 말갛게 웃던 김효진. 효진이 효진을 내려다본다. 자연스럽게 내린 앞머리와 새하얀 옷, 깔끔하게 올린 머리를 하고 올블랙의 옷을 입은 둘은 누가 봐도 헷갈릴 일 없이 상극이다. 또 다른 자신을 마주친 효진은 놀라지도 않은 듯 움직이지 않는 몸으로 겨우 눈동자만 굴렸다. 무언가 말하고 싶은 듯 입을 벙긋거리는 걸 무시하곤 그를 그대로 지나쳤다. 조금 전까지 신호를 주고받던 무전기와 레이더에 표시된 초록색 점 하나를 확인하곤 미련 없이 몸을 뺐다. 안부 정도는 전해줄게. 당연하게도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10.

괜찮아. 네가 알려줬잖아. 우린 3월 2일에 처음 만난다고.

다시 시작하면 돼.

네가 헷갈리는 거라면 헷갈리는 걸 다 없애버리면 되는 거잖아. 그렇지?

동기화가 끝난 듯 디바이스가 새로운 날짜를 띄웠다. 새로 맞이할 날을 기념하며 효진은 라이터를 켰다. 유일한 빛은 작고 뜨겁다. 미리 준비된 초에 옮겨 붙은 불이 어둠을 몰아냈다.

또 우리 기념일이다.

일렁이는 불빛을 한참이나 바라보다 훅 껐다. 쓰레기통에 처박힌 케이크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무너졌을 것이다. 까만 우주선을 벗어나는 이는 미련 한 조각도 남기지 않고 문을 열었다. 바깥엔 눈보라가 한창이었다. 온통 노을빛으로 물든 세상에서 단 하나, 물들지 않고 새하얀 이승준이 보인다.

 

 

 

 

 

* 넬 - still sunset 가사 일부 차용

** 마블 세계관 넘버 참고







@springwinter4x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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