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세상에서 이루어진 꿈에 관한 이야기 上 - 독
23-03-01 23:49

1.

 

“미안하다, 효진아.”

 

고개를 푹 숙인 팀장님의 정수리가 휑했다. 삼십 대라고 들었는데 벌써 머리카락이 별로 없으시구나. 얼마나 고생을 많이 하셨으면. 하긴 방금 전에 들은 말만으로도 그가 했을 고생의 크기가 짐작됐다. 데뷔일이 잡혔다는 소리를 들은 게 불과 며칠 전이었는데. 같이 데뷔할 친구들이니 인사하라며 낯선 애들과 정식 대면 자리도 가졌었다. 최종 인원은 다섯 명, 올여름 첫 곡을 발표하는 걸 목표로 맹연습에 들어가는 것이 효진이 속한 데뷔조의 향후 계획이었다. 

 

그리고 방금 들은 말에 따르면 그 다섯 명 중 세 명이 어제 회사와 계약을 해지했다. 아마 다른 데서 빼간 모양이라고, 돈은 많고 시간은 들이기 싫은 엔터 회사들이 가끔 이런 짓을 한다고 말하며 팀장님은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효진이 너한테 면목이 없다. 마주 앉은 회의실 책상 위로 적막이 흘렀다. 스스로도 무슨 감정을 느끼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어 효진은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데뷔 엎어지는 덴 정말 온갖 이유가 있구나. 그리고 그 온갖 경우의 수를 다 겪는 운명을 타고 태어난 게 자신인 것만 같았다. 

 

열아홉 살에 오디션을 보고 합격해 한 중소 엔터테인먼트에 연습생으로 들어온 지 5년. 시작 자체가 늦기도 했지만 한 살씩 나이를 먹어갈수록 불어나는 조바심과는 반대로 선택의 폭은 좁아져만 갔다. 십 대 후반에서 이십 대 초반으로 구성된 다인원 그룹의 센터 멤버에서 형 라인 메인보컬로, 맏형이자 메인보컬이자 리더로 포지션이 점점 바뀌었다. 그리고 이제 그 포지션마저도 위태로운 지경이었다. 실력 좋고 믿음직한 캐릭터에도 허용되는 나이라는 게 있는 탓에. 

 

“조금만 더 기다려 봐. 이번에는 정말 형이 너 책임지고 데뷔시켜 줄게.”

 

응? 진짜 할 수 있다니까? 한 번만 더 참아 보자 효진아. 회의실 책상을 내려다보며 효진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번에라니, 어디서부터가 ‘이번’에 속하는 건지 감도 잡을 수 없었다. 다시 사람을 뽑고 그들이 도망가지 않도록 계약을 원만히 체결하고, 컨셉을 정비하고 곡을 받고 녹음을 하고 연습을 하고. 그러고 나면 또 무슨 일인가 일어나 데뷔 자체가 백지가 될 것 같았다. 한두 번 있던 일이 아니라서 그렇게 될 미래를 생생히 그릴 수 있었다. 효진은 고개를 숙인 채 떠올렸다. 지금껏 이런 식의 대책 없는 말로 저를 붙잡아 왔던 회사의 행적과 그로 인해 얻게 된 결과에 대해서. 효진에게서 한참 동안 대답이 없자 머리 옅은 팀장이 조급해진 목소리로 회유의 말을 뱉었다. 지금까지 버틴 게 아깝잖아, 효진아. 너 여기 나보다 오래 있었지?

 

“어차피 이제 어디 갈 수 있는 데도 없잖아.”

 

순간 목구멍으로 열 덩어리 같은 게 치솟았다. 하지만 상대는 그저 사실을 말한 것뿐이다. 화를 내면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어린애가 될 뿐이었다. 효진은 차분히 숨을 가라앉혔다. 배신감, 울분, 억울함 같은 끈적한 감정들이 밀고 올라와 가슴을 답답하게 했다. 밑바닥까지 침잠하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고개를 들자 팀장은 순간 겁을 집어먹은 얼굴로 횡설수설했다. 내 말은, 그만큼 니가 여기서 누구보다 오래 버텼으니까 대단하다 이거지. 되는대로 주워섬기던 팀장이 목을 가다듬으며 일어섰다. 효진아 형 잠깐 물 좀 마시고 올게. 엉거주춤 몸을 돌린 그는 심호흡을 하며 회의실 문을 열고 나갔다.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저 새낀 눈빛이 아주. 회사에서 오랫동안 필사적으로 효진을 붙잡아 놓으려고 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딱 봐도 보통 놈은 아니었다. 저 기질이 나쁜 방향으로 흘러가면 통제하기 힘들 것이고, 운 좋게 잘 제어할 수 있다면…. 팀장은 문득 오늘 면담 예정인 또 한 명의 연습생의 얼굴을 떠올렸다. 김효진을 제어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

 

거기까지 흐르던 생각이 뚝 멎었다. 탕비실로 이어진 복도 저편에서 누군가가 전속력으로 달려오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왜인지 몸을 가누지 못하는 것처럼 자세가 엉망이었다. 뭐지? 의문을 가지기도 전에 눈앞으로 다가온 손에 목덜미가 잡아채였다. 억 소리도 내지 못할 만큼 순식간이었다.

 

제 목줄기를 쥐어 바닥으로 내리누른 건 평소에 관심 있던 사내 여직원이었다. 오랜 노력 끝에 약속을 잡는 데 성공해서 조만간 같이 밥을 먹기로 했던 총무팀 이 대리. 그러나 그건 더 이상 제가 알던 이 대리의 모습이 아니었다. 번뜩이는 눈을 하고 송곳니를 드러낸 채 목 긁는 소리를 내는 그것은 인간이라기보다는 들짐승이나 광견에 가까웠다. 여자가 팀장의 목덜미에 이를 깊게 박은 채 고개를 휘둘렀다. 촤아악, 살이 찢겨 나가는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궤적을 그리며 피가 솟구쳤다. 팀장은 이 대리―의 모습을 한 어떤 것―를 떼어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발버둥 쳤다. 도려내진 살점 사이로 울컥대며 흐른 피가 복도 바닥에 고여 흰 셔츠를 빠르게 물들었다. 

 

곧 팀장이 온몸에 힘을 잃고 축 늘어지자 여자는 퍼뜩 고개를 들고, 제가 물었던 고깃덩이엔 더 관심이 없다는 듯 괴성을 지르며 다른 방향으로 뛰어갔다. 잠시 후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팀장의 몸이 감전된 듯 퍼덕거렸다. 

 

*

 

무슨 소리지? 멀리서 비명 같은 게 들린 것 같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날카로운 소리도. 회의실 책상 앞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던 효진이 문득 출입문 쪽을 바라보았다. 물을 마시러 간다던 팀장님은 삼십 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다른 급한 일이라도 생겼나. 의아함에 몸을 일으켜 회의실 문을 열자 인적 없이 고요한 복도가 효진을 맞이했다. 

 

“팀장님?”

 

괜스레 신경이 곤두서는 이상한 고요함이었다. 일부러 목소리를 크게 내 보아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직원 사무실이 있는 층으로 올라가기 위해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하는 순간 조금 전보다 더 명확한 비명 소리가 들렸다. 

 

막연한 직감이 효진을 휘감았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 틀림없었다. 뭔지는 몰라도 보통은 아닌 일이. 몸을 반대로 돌려 비상계단이 있는 쪽으로 급히 달려갔다.

 

계단을 뛰어 올라가 위층 복도로 이어진 문을 열었을 때 효진이 본 것은 지옥도였다. 사람들이 곳곳에 쓰러져 있었다. 모두 피부의 어딘가가 무참히 찢겨 바닥이 흥건할 만큼 많은 피를 흘리는 채였다. 충격을 받고 주춤 물러서는 사이 아아악, 하는 또렷한 절규가 효진의 귓전을 때렸다.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복도 끝 바닥에서 온몸을 뒤틀며 발버둥 치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그 남자는 등을 보이고 있는 누군가에게 어깨를 물어뜯기는 중이었다. 

 

물어뜯겨? 효진은 제가 보고 있는 광경의 기이함에 눈을 의심했다. 말 그대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물어뜯고 있었다. 사냥을 하는 육식동물이나 괴물이라도 된 것처럼, 이로 물어 짓이기고 살을 찢었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피를 내뿜으며 마구 소리를 지르던 남자가 어느 순간 의식을 잃고 툭 몸을 늘어뜨렸다. 그러자 그의 어깨에 달라붙어 있던 사람이-사람이라고 하기엔 기괴한 움직임의 형상이-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탐색하던 그것의 고개가 홱, 하고 뒤를 돌았다. 확장된 동공으로 새까맣게 뒤덮인 눈이 복도 중간에 몸을 내밀고 선 효진의 눈과 정통으로 마주쳤다. 조금 전까지 저와 함께 있던 팀장이었다. 

 

경악할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효진은 저를 발견하고 맹렬한 속도로 돌진해오는 팀장을 피해 있는 힘껏 문을 당겨 닫았다. 금속성의 문이 콰앙, 하고 닫히자마자 문 벽에 몸이 퍽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잠시 손잡이를 꼭 쥔 채 숨을 몰아쉬었다. 너무 비현실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분명 제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복도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던 것은 자주 얼굴을 마주하던 회사 직원들이었고, 눈앞에서 그중 한 명을 물어뜯던 것은 삼십 분쯤 전에 자리를 뜬 팀장이었다. 

 

상황 파악을 끝낸 효진이 미친 듯이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탕비실과 직원 사무실이 있는 곳이 6층, 저와 팀장이 있던 회의실은 5층이었고 연습실은 지하 1층이었다. 효진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는 건 단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빨리, 조금 더 빨리. 한꺼번에 두세 계단씩 뛰어 아래로 내려갈수록 심장이 마구 요동치고 숨이 찼다. 하지만 한시가 급했다. 1층에 도달하자 비상계단 바깥쪽에서 아우성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현관을 통해 밖으로 빠져나가는 중인 듯했다. 개의치 않고 효진은 한 층 더 내려가 곧바로 철문을 열어젖혔다. 

 

“이승준!”

 

앞뒤 볼 것 없이 크게 소리치며 복도를 내달렸다. 팀장과 면담을 하기 전 승준은 오늘 계속 안무 연습실에 있을 거라고 했다. 물론 그 말을 듣지 않았어도 이곳으로 왔을 것이다. 이미 데뷔가 무산됐다는 사실을 둘 다 알고 있었으니까. 

 

실력 좋고 믿음직한 리더 포지션조차 위태로운 건 저뿐만이 아니었다. 데뷔가 엎어지는 온갖 경우의 수를 다 겪고 있는 건 한날한시에 같이 연습생이 된 승준도 마찬가지였다. 마음이 어지러울 때 승준은 연습을 했다. 원래 춤을 추던 애여서, 몸을 움직여 심란한 감정을 풀어내는 버릇이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효진!”

 

예상대로 승준은 지하에 있었다. 제 이름이 복도에 울리자마자 효진은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몸을 틀었다. 승준은 1층으로 올라가는 중앙 계단을 등진 채 이성을 잃고 달려드는 누군가를 힘겹게 막아내는 중이었다. 마이크 스탠드의 양쪽을 잡고서 자신을 덮쳐오는 광폭한 움직임을 견뎌내고 있었지만 곧 무너질 것 같은 자세였다. 금방이라도 물어뜯을 듯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는 것은 효진도 얼굴을 아는 연습생 동생이었다. 형, 하고 서글서글하게 말을 붙여 오던 그 남자애의 웃는 모습이 오버랩 되어 떠올랐다. 

 

젠장. 속으로 욕을 짓씹고 효진은 곧장 그 애에게 몸을 날렸다. 퍼억, 발길질에 나동그라진 남자애가 다시 일어서기 전에 승준의 팔을 붙잡고 중앙 계단을 뛰어올랐다. 반쯤 올라갔을 때 몸을 일으킨 남자애가 순식간에 계단을 밟아 등 바로 뒤까지 따라붙었다. 효진에게 몸을 내맡기듯 이끌려 달려가던 승준이 바닥에 잠시 힘을 주고 서서 마이크 스탠드를 펜싱 칼처럼 내질렀다. 긴 금속 봉을 고정한 삼각 받침대가 뒤따라오던 남자애의 배를 정통으로 맞히고 부서져 나갔다. 마구 달려오던 속도 그대로 계단 아래에 나동그라지는 것을 끝으로 그 애의 모습은 더 보이지 않았다. 

 

중앙 현관을 지나 출입문 밖으로 나갔지만 바깥 역시 이미 아비규환이었다. 길바닥 여기저기에 사람들이 쓰러져 있었다. 진득한 피가 곳곳에서 분수처럼 솟아 콘크리트 바닥을 새빨갛게 뒤덮는 중이었다.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는 사람들을 기괴한 움직임으로 쫓는 뒷모습도 보였다. 

 

효진이 승준의 팔을 붙잡은 채 도로가 있는 큰길 쪽으로 내달리려 할 때 바닥에 쓰러져 있던 사람 중 한 명이 몸을 일으켜 그들과 눈을 마주쳤다. 눈 전체가 까만색이었다. 이번에는 승준이 효진의 팔을 반대쪽으로 끌어당겼다. 네 방향으로 뚫려 있는 길목에 전부 피투성이를 하고 부자연스럽게 선 이들이 있었다. 건물 맞은편 편의점으로 내달린 승준이 몸으로 유리문을 힘껏 밀고 들어갔다. 

 

쥐고 있던 마이크 스탠드 봉을 손잡이에 가로질러 끼우자 밖에서 열리지 않게 되었다. 효진과 승준을 쫓아 달려오던 까만 눈의 사람들이 편의점 문에 퍽 하고 몸을 부딪치고 반동으로 나자빠지는 것이 보였다. 벽 쪽으로 숨어 살펴보자 다시 몸을 일으킨 그들은 목표물을 재탐색한 듯 다른 방향으로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했다. 

 

후우. 

 

승준이 붙잡고 있던 효진의 팔을 당겨 계산대 쪽으로 이끌었다. 매장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의아해 하는 효진에게 승준이 저기… 하고 손을 뻗어 큰길로 향하는 맞은편 거리를 가리켜 보였다. 거기에 이 편의점 아르바이트 유니폼을 입은 남자가 피투성이를 하고 서 있었다. 아마도 비명소리를 듣고 밖으로 나갔다가 당한 모양이었다. 

 

“…….”

“…….”

 

두 사람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천천히 카운터 아래로 들어가 몸을 숙이고 앉았다. 다행히 바깥에서 어슬렁거리는 이들은 눈에 보이지 않으면 목표물이 없다고 판단하는 듯 안으로 들어오려고 하지 않았다. 주위의 기척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숨을 몰아쉬며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고요한 시간이 몇 분쯤 더 흐를 때까지 누구도 서로에게서 눈을 돌리지 않았다. 그래서 많은 대화를 생략할 수 있었다. 이미 상대가 하려는 말을 대강 읽어낸 덕이었다. 이게 다 무슨 일이야. 너는 알겠어? 나도 몰라. 무사해서 다행이다. 네가 여기 있어서 다행이다. 걱정했어. 무서웠어. 승준이 한숨을 길게 내쉬며 효진의 어깨에 이마를 들이박았다. 잘게 떨리는 마른 몸이 숨 쉴 때마다 위아래로 크게 들썩거렸다. 효진이 팔을 뻗어 떨고 있는 몸을 감싸 안았다. 승준의 어깨 위로 둘러진 효진의 팔 역시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애들이랑 안무 연습하고 있는데, 상훈이 형이 들어온 거야.”

 

떨림이 조금 잦아들고 나서 승준이 입을 열었다. 

 

“그 새로 왔다는 매니저 형?”

 

고개를 들었으나 손은 여전히 서로의 팔 언저리를 잡은 채였다. 몸을 떼어내기에는 둘 다 아직 불안한 탓이었다. 승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 눈이 이렇게… 무섭게 변해서 뛰어 들어오더니 애 하나를 냅다 덮쳐가지구… 형 뭐 하는 거냐구, 떼어내려고 했는데 너무 세게 물어뜯어서….”

“…….”

 

피가 다 튀고 막 난장판이 됐는데, 또 다른 애를 물려 그러길래 얼른 다들 밖에 나가라고 하고 저 봉, 뭐냐 마이크 스탠드, 쩌거로 일단 다리를 쳐서 쓰러뜨린 다음에 물린 애를 데리고 나왔거든. 연습실 문 닫구… 그랬는데 이번엔 걔가 나한테 달려들어서. 

 

그때 가까운 곳에서 저를 크게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효진의 이름을 외치면서 승준은 안도감에 울음이 터질 뻔했다. 조금이라도 늦었으면 저 역시 그 애에게 물어뜯겼을 게 뻔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십년지기 친구가 전속력으로 달려와 남자애를 밀쳐내고 계단으로 끌어 올려준 덕분에 살 수 있었다. 효진이 아니었으면 지금쯤 저도 바깥에 있는 피투성이의 사람들과 같은 모습이었을 거라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했다. 

 

“아 진짜, 효진 너 아니었으면 나….”

 

그때의 다급했던 상황을 눈앞에 떠올린 승준이 효진의 팔을 잡은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을 주었다. 바들거리며 떨리는 손을 한 손으로 덮은 효진이 악력을 실어 꽉 쥐며 진정시켰다. 괜찮아. 이제 됐어. 잘했어, 잘했어.

 

“…나는 팀장님이었어.”

“…….”

“물 마시러 간다 그러구 안 오길래, 위로 올라가 봤거든. 그랬더니….”

“…….”

 

효진이 봤을 장면이 대충 짐작 간다는 듯 승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효진 역시 제가 본 지옥도를 떠올리며 어두운 얼굴을 했다. 아마 위층에 있던 사람들은 다 물렸을 거야. 복도 곳곳에 쓰러져 있던 회사 직원들의 처참한 모습이 눈앞에 생생했다. 그 건물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제 아무도 멀쩡하지 않을 것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 애초에 이게 다 뭘까. 이 상황과 가장 비슷한 건 언젠가 봤던 좀비 영화의 한 장면이었다. 좀비가 사람을 물고, 감염된 사람이 좀비로 변해 또 다른 사람을 물고. 아비규환이 되고 피와 살이 튀는 징그러운 장면들. 정말 그런 영화 같은 일이 현실이 된 걸까. 고민에 빠져들려던 찰나 승준이 효진의 팔을 흔들어 상념을 깨웠다. 효진 핸드폰 갖고 있어? 

 

그제야 효진은 회의실 책상 위에 핸드폰을 두고 나온 것을 떠올렸다. 아, 큰일 났네. 잊고 있었다. 신고를 해야 하는데 둘 다 핸드폰이 없었다. 승준은 앉은 채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펴보았다. 계산대 아래에 유선으로 연결된 전화기가 놓여 있었다. 수화기를 들어 보니 신호음이 들렸다. 

 

효진에게 긍정의 눈빛을 보낸 뒤 바로 119를 누른 승준이 입을 뻐끔거리며 다급하게 물었다. 효진 근데, 뭐라고 신고해야 돼? 

 

“…좀비가 나타났어요?”

 

똑같은 생각 하고 있었구나. 연결된 듯한 사고회로에 효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부정의 뜻으로 받아들인 승준이 울상이 되어 다시 물었다. 어? 뭐라고 해야 돼. 짧게 울리던 신호음이 끊기기 직전 효진이 일단 위치부터 대, 하고 빠르게 대답했다. 

 

네 119죠, 여기 그, 희원1동 MI엔터테인먼트 앞 편의점인데요. 네 삼정구 희원동이요. 지금 사람 두 명이 여기 안에 갇혀 있거든요? 밖에 사람들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시점에서 좀비라는 단어를 입 밖에 낼 필요는 없었다. 이미 소방대원이 상황을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희원동에서 신고가 너무 많이 들어오고 있어서 곧바로 출동하지는 못할 수도 있어요. 그러니 밖으로 나가지 말고 지금 있는 곳에서 안전하게 대기하고 있으라는 말을 끝으로 전화는 끊겼다. 그것만으로도 둘은 마음이 한층 편안해졌다. 이제 누군가 구해주러 올 거라는 희망이 생겼으니까. 

 

전화를 끊고 나서 승준은 다시 계산대 주변을 중심으로 이곳저곳을 살피기 시작했다. 앉아있던 효진이 몸을 일으키는 승준을 붙잡으며 눈짓으로 밖을 가리켰다. 보이면 어쩌려고. 효진이 끌어당기는 대로 도로 앉은 승준은 머쓱하게 계산대 앞 벽을 바라보았다. 쩌기 들어가 보려구 했지. 

 

승준이 바라보는 곳에는 회색 문이 반쯤 열린 직원실이 있었다. 저 안에 컴퓨터 있을지도 모르잖아. 직원실과 유리문 쪽을 번갈아 바라보던 효진이 고개를 돌려 담배 진열장 밑에 기대어 있는 종이 박스를 하나 끌어왔다. 있어 봐. 제법 큰 박스의 이음새 부분을 손으로 찢어낸 다음 펼쳐진 면을 세워 든 효진이 몸을 숙인 채 계산대 밖으로 나갔다.

 

문 밖에는 아직도 상당한 수의 사람들이 괴성을 지르며 뛰어다니고 있었다. 재빨리 벽에 붙어 앉아 종이 박스를 앞으로 밀었다. 조심스러운 움직임 덕에 소리도 거의 나지 않았다. 곧 긴 박스가 유리문 아래를 가로로 막은 모양새가 되자, 효진이 가려진 부분 위로 몸이 솟지 않도록 조심하며 계산대 뒤로 돌아왔다. 승준이 흥분한 눈을 하고 허공에서 손이 닿지 않게 박수를 쳤다. 이제 몸을 숙여 이동하기만 하면 밖에서 보이지 않을 터였다.

 

긴장한 채 직원실 문을 활짝 열자 한 평 남짓한 공간이 시야에 들어왔다. 양쪽 벽으로 사물함과 옷걸이가 서 있고, 책상 위에 오래돼 보이는 데스크탑이 놓여 있었다. 있다! 승준이 얼른 책상 앞으로 다가가 데스크탑의 전원 버튼을 눌렀다. 부팅이 오래 걸리고 경운기 돌아가는 소리 같은 게 나긴 했지만 어쨌든 작동한다는 게 중요했다. 승준이 요 몇 분 중 가장 기뻐 보이는 얼굴을 하다가, 밝아진 화면 위로 비밀번호를 입력하라는 문구가 뜨자 다시 시무룩해졌다. 

 

“비밀번호 어떻게 하지?”

“a1234567890* 해봐.”

“…안 되는데?”

“…어디 안 적혀있을까?”

 

직원실 안에 비밀번호가 적혀있을 만한 쪽지나 수첩 같은 건 없었다. 철제 사물함을 열어봤지만 알바생의 것인 듯한 백팩과 얇은 점퍼가 사물함 바닥에 놓여 있을 뿐이었다. 다시 몸을 숙이고 직원실 밖으로 나간 효진이 계산대 아래에 어지럽게 쌓여 있는 문서들을 뒤적였다. 대부분 물품을 체크한 장부나 전표들이었다. 

 

그중 점장이 알바 교육을 위해 사용하는 것 같은 파일철을 찾아낸 효진이 앞장을 빠르게 넘겨 각종 숫자들이 쓰여 있는 페이지를 발견했다. 매장 전화번호, 와이파이 비밀번호 사이에 컴퓨터 로그인 번호가 적혀 있었다. 

 

비밀번호를 넣고 엔터를 치자 각종 관리나 회계 프로그램들이 깔린 바탕화면이 나타났다. 승준은 빠르게 인터넷 브라우저를 열어 포털사이트 뉴스란을 클릭했다. 

 

놀랍게도 관련 뉴스는 아무것도 없었다. 기사 제목들로 이루어진 세상은 거짓말처럼 평화로웠다. 

 

멈칫한 승준이 이내 새 탭을 열고 SNS 주소를 쳐 로그인했다. 검색창에 ‘희원동’이라는 단어를 넣고 엔터를 누르자 맨 위에 지금 가장 활발히 확산되고 있는 게시물 하나가 나타났다.

 

[희원동에 좀비 나타남] 32분

8,667리트윗 7,050인용 120마음에 들어요

이 계정 소유자가 트윗을 볼 수 있는 사용자를 제한하고 있어 이 트윗을 볼 수 없습니다. 자세히 알아보기

[진짜임 물리면 똑같이 변함]

 

그 글에는 영상이 함께 있었다. 한 카페 안으로 몰려 들어온 새까만 눈의 무리가 앉아있는 사람들에게 무서운 기세로 달려드는 모습이었다. 효진과 승준도 익히 알고 있는 이 근방의 유명 카페였다. 그들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려는 사람들의 몸 어딘가를 거세게 낚아채 이로 물어뜯고 있었다. 흔들리는 화면 속에서 처참한 광경이 약 10초간 이어졌다. 

 

영상이 끝나기 전 누군가를 물어뜯은 ‘좀비’가 입가를 피로 물들이고 영상을 정면으로 쳐다봤다. 이 글을 올린 사람은 괜찮을까, 절로 그런 걱정이 들었다. 반응은 가지각색이었다. 

 

???

ㄷㄷㄷ

뭐냐 이게

보나마나 광고지 뭐

영화 촬영 아님? 

개무서워

오 리얼한데 

요새 트위터 이런 자극적인 컨텐츠 왜케 많음

 

다들 진심으로 믿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영상이 있는 게시물은 이 글 하나가 전부였고, 워낙 비현실적이라 영상을 보아도 믿기 힘들긴 했다. 승준은 다시 검색창에 ‘좀비’라는 단어를 넣어 검색했다. 조금 더 많은 실시간 반응이 나타났다. 

 

서울에 좀비 나타났다는데 진짜야? 

알티한 거 ㄹㅇ 좀비 같네 

좀비? 뭔일임

좀비물 보고 싶다 추천 좀 

 

대부분 현재 확산되고 있는 영상의 진위 여부를 궁금해 하는 글이었고, 다른 지역에서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이야기는 없었다. 

 

“제일 먼저 시작된 게 여기인가 봐.”

 

승준이 그렇게 말하며 직원실 바깥으로 시선을 던졌다. 이 근처, 이 동네. 다른 곳 얘긴 하나도 없잖아. 효진도 동의했다. SNS에 올라온 글이 32분 전이고 관련 기사가 아직 없는 것으로 보아 이건 벌어진 지 적어도 한 시간 이내의 일일 것이다. 어쩌면 자신들이 본 것이 가장 최초에 가까운 희생자들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아무 제약 없이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물려 전염될 것이고, 그러면 다른 지역으로 퍼져 나가는 건 시간문제였다. 효진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승준이 키보드를 두드려 SNS에 글을 작성했다. 

 

[저는 희원동에 있는 MI엔터테인먼트 연습생입니다. 좀비 때문에 저랑 친구도 지금 대피해 있어요. 물린 사람들이 밖에 돌아다니고 있으니까 다들 조심하세요. 장난X] 

 

딸깍, 업로드 버튼을 누르자 승준의 계정으로 작성된 글이 게시되었고 조금 후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빠르게 정보를 전하는 행동력에 효진이 감탄하고 있는 동안 승준은 다시 포털 뉴스란으로 되돌아가 새로 업데이트된 기사를 검색했다. 

 

[[속보] 서울 삼정구 희원동 일대 집단 폭력 사태 발생]

 

올라온 지 1분도 안 된 최신 기사였다. 클릭하니 제목만 있을 뿐 본문이 없었다. 새로고침하자 이번에는 상황을 설명하는 기사가 하나 더 올라왔다. 

 

[서울 삼정구 희원동에서 연속적으로 집단 폭력 행위를 일으키는 사건이 발생해 백여 명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했다고 소방 당국이 밝혔다. 해당 폭력 사태를 일으킨 집단은 희원동 일대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한 것으로 보이며, 사태의 정확한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아… 부족한데. 물리면 전염된다고 해야 되는데. 그래야 사람들이 빨리 피하지. 답답한 마음에 효진이 하,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좀비가 나타났다고 하는 게 더 도움 되겠다. 그러나 여기에 갇혀 있는 이상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구조대나 경찰이 앞으로 상황을 잘 파악하고 수습해주길 바랄 뿐이었다. 

 

“그래도 사람들이 이제 영상 믿어주겠다.”

“그러게.”

“…진짜 좀비는 아니겠지?”

 

자기 손으로 방금 전에 좀비 때문에 대피해 있다고 써놓고서. 승준은 불안한 표정으로 효진을 올려다봤다. 좀 있으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는 거겠지? 그럼 빨리 병원 가서 치료받으면 좋겠다. 

 

몇십 분 전까지만 해도 같이 멀쩡하게 대화하고 연습하고, 거리를 걸어 다니던 사람들이었다. 이성을 상실한 모습으로 변해버렸다고는 해도, 다친 상태로 계속 어딘가를 배회 중인 것이 걱정스러운 것이다. 효진도 그 마음을 이해했다. 아무리 괴물 같은 모습이라고 해도 얼마 전까지는 평범했던 사람들이 영영 되돌아오지 않는 건 아닐 거라는 희망쯤은 갖고 싶었다. 

 

“아무튼 좀 더 기다려보자.”

 

구조대도 온다고 했고, 조금 있으면 제대로 상황 알려주는 기사도 올라오겠지. 그렇게 말하는 순간 효진의 배에서 꼬르륵, 하는 소리가 났다. 

 

승준이 효진을 바라보며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스스로도 뭘 들은 건지 실감이 안 난 효진이 잠시 말없이 눈을 깜박였다. 

 

“…효진. 이 와중에?”

 

장난스런 표정을 한 승준의 얼굴을 작은 손바닥이 훑어 내렸다. 승준이 제 얼굴을 덮은 손을 치워내며 어푸푸, 하고 과장된 반응을 했다. 나 점심도 안 먹었거든? 누가 뭐래? 이 상황에서도 효진 배꼽시계는 완전 정확하다 이거지. 안 그래도 면담 때문에 점심시간을 놓친 탓에 공복 상태였다. 당황한 효진의 얼굴을 보며 몸을 접어 웃던 승준이 하아, 하고 긴장이 풀린 듯 긴 숨을 내쉬었다. 근데 나도 점심 안 먹었어. 마음이 심란해서 끼니도 거르고 연습 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평소처럼 장난을 치며 웃고 나자 불안이 아주 조금은 가시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 모든 비현실적인 일이 사실은 그리 심각한 일이 아닐 거라고 스스로를 달래는 것이 아직은 가능한 덕분이었다. 

 

“…돈 안 내고 먹어도 될까?”

“이거는 사장님도 이해해주실 거야.”

“그치?”

“아니면 나중에 카드 갖고 다시 와서 계산하면 되지.”

“그래그래.”

 

편의점 안에는 당연하게도 먹을 것과 마실 것이 있었다. 뭐 먹을래? 불고기? 효진은 몸을 숙이고 냉장칸으로 가 도시락 두 개를 골라서 계산대 뒤로 돌아왔다. 와중에 음료수 한 캔씩을 챙겨 오는 것도 잊지 않았다. 둘은 도시락과 음료수를 바닥에 늘어놓고 식사를 시작했다. 

 

“지금 몇 시지?”

“두 시 반 정도.”

 

승준이 제 손목에 찬 시계를 보고 대답했다. 효진은 면담 중에 팀장이 돌아오지 않아 시계를 본 것이 한 시 조금 넘은 시간이었던 것을 기억했다. 그 일로부터 고작 두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 놀라웠다.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은 배를 도시락으로 빠르게 채우는 동안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은 어떤 말을 해도 의문으로만 연결될 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입으로 밥을 밀어 넣는 동안에도 이따금씩 밖에서 누군가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그럴 때마다 조금 전의 일들이 생생한 영상이 되어 눈앞에 재생되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식사를 끝내고 음료수까지 다 마신 후 계산대 뒤 벽에 나란히 기대어 늘어질 때까지도 구조대가 오는 듯한 기색은 없었다. 

 

“…다시 신고할까?”

“아까보다 신고 더 들어오고 있을걸. 우리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을 거야.”

 

아무튼 간에 우리는 지금 안전한 곳에 있으니까. 그런가. 효진에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승준이 번뜩 몸을 일으켜 돌아보며 말했다. 효진! 가족들한테 연락 안 해도 돼? 그제야 효진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무리 구조대가 올 거라지만 기사 때문에 걱정하고 있을 가족들에게 연락을 취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지금쯤 핸드폰이 불나게 울리고 있을 것이다. 

 

“어?”

 

그러나 계산대 아래의 수화기를 들었을 때 신호음은 사라져 있었다. 버튼을 아무리 눌러도 소리가 나지 않았다. 뭐야 전화 왜 안 돼. 수화기를 귀에 댄 채 번호를 눌러대던 승준의 말을 듣자마자 효진의 등줄기로 이유 모를 소름이 끼쳤다. 딱딱하게 굳은 효진의 표정을 본 승준이 재빨리 직원실 안으로 뛰어 들어가 컴퓨터 화면을 켰다. 

 

아직 인터넷은 연결돼 있었다. 조금 전 올린 SNS 글은 이미 몇천 단위로 리트윗되는 중이었다. 괜찮으세요? 무사하시길 빕니다, 같은 답글이 달려 있어 승준은 이 와중에도 조금 감동했다. 뉴스란으로 들어가 얼른 새로고침을 하자 실시간 뉴스가 쏟아져 나왔다. 이제 한 화면 전체가 관련 기사였다. 효진이 곁으로 다가와 심각한 얼굴로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서울 삼정구 미확인 감염병 확산]

 

[…희원동을 중심으로 시작된 무차별 집단 폭력 사태가 정체불명의 박테리아로 인한 감염병에 따른 것으로 추정되는 가운데 감염이 빠른 속도로 퍼지고 있어 주변 지역에 피해가 확산되고 있다.]

 

[해당 질병에 감염된 이들은 이지 상실, 발작에 가까운 공격성을 보이며 또 다른 숙주(비감염자)의 신체를 물어뜯어 체액을 혈관에 침투시키는 방식으로 감염을 퍼뜨리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로는 긴급 소집된 대책본부가 질병의 원인과 정확한 발생 경위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말이 이어졌다. 정확히 어떤 피해가 어느 정도로 확산되고 있는지에 대한 정보는 나타나 있지 않았다. SNS에서는 서울 지역의 대형 마트에서 식료품 사재기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과, 지금까지 발표된 사항들을 토대로 어떻게 하면 좀비가 되지 않는지에 대한 토론이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

“이거 봐. 그래도 공기 감염이 안 되는 건 다행이래.”

“…그거야 그렇지.”

 

공기 중으로 감염되는 거였으면 너랑 나도 이미 좀비야. 효진이 중얼거리며 토론이 이루어지고 있는 타래를 읽기 위해 스크롤을 내렸다. 

 

“근데 영화에서 보면 좀비들은 막 인육 먹고 그러잖아.”

 

저 사람들은 물어뜯긴 해도 먹진 않는 것 같던데. 효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팀장부터가 그랬다. 일단 한번 물어뜯어 상처를 낸 사람에게는 더 이상 관심을 보이지 않고 새로운 사냥감을 찾는 것 같았다. 감염을 확산시키는 걸 최우선 순위로 두기 때문이겠지.

 

“그리고 물리고 나면 일단 쓰러져 있다가 다시 일어나.”

“…얼마 정도였지?”

 

승준은 연습실 밖으로 끌고 나온 남자애가 정신을 잃고 있다가 깨어나 제게 달려들 때까지의 시간을 더듬어 보았다. 

 

“한 1~2분?”

 

더 빠를 수도 있어. 체감상 그것보다도 더 빨랐던 것 같애. 그때 상훈이 형 다시 일어서기 전에 애 들쳐메고 나와야 돼서 엄청 빨리 움직였거든. 진짜 한 1분? 듣고 보니 감염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는 말도 이해가 갔다. 누군가 피를 흘리며 쓰러진 것을 보고 당황해서 허둥거리고 있으면 그 사람이 바로 다시 일어나서 달려드는 거다. 아무 대응도 할 시간이 없어 무방비하게 당하고 마는 것이다.

 

두 사람은 해가 질 때까지 컴퓨터 앞에만 붙어 앉아 기사를 검색하고 새로운 정보를 찾아 헤맸다. 구조대가 올 때까지는 갇힌 상태로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던 데다, 전화가 연결되지 않게 되자 의지할 것이 인터넷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대부분 같은 얘기가 돌고 도는 수준이었고, 새로운 정보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해가 완전히 져 밖이 모두 깜깜해지고 난 뒤에야 방역대책본부에서 새로 발표했다는 내용의 기사가 떴다. 

 

[서울 미확인 감염병, 피해 규모 추정 불가]

 

[…해당 병에 감염되고 나면 최소 14초에서 최대 1시간 이내에 신체가 변이되어 사망하며, 물린 부위가 뇌에 가까울수록 빠르게 변이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사망 후에도 신체 운동이 지속되기 때문에 현재 감염자의 대다수가 실질적으로는 사망자인 것으로 보이며, 확산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어 사망자 수를 추정하기에 어려움이 크다는 입장이다.]

 

기사를 읽어 내려가며 두 사람은 잠시 말을 잃었다. 승준이 별안간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바깥을 바라보았다. 

 

“그럼 저 사람들이 다 죽은 상태라는 거야?”

 

효진이 화면에 시선을 붙박은 채 무거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변이가 끝났으면, 그렇겠지. 승준이 믿을 수 없다는 듯 허망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니, 저렇게 움직이고 있는데? 

 

시간이 지나면 되돌아오지 않을까. 약을 먹고 치료를 받으면 나아질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던 마음에 어둠이 드리워지는 느낌이었다. 이미 죽은 거라면 이제 치료받는다고 해도 원래대로 돌아갈 가능성은 없는 것이다. 승준아. 효진이 무거운 목소리로 새삼스레 익숙한 이름을 불렀다. 

 

“절대 물리지 말자.”

 

큰 눈을 깜박이며 멍하니 효진의 굳은 얼굴을 바라보던 승준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방법이 있을 거라고 스스로를 달랠 수 있는 시기는 이제 지났다. 밖은 좀비로 가득 차 있고, 우리는 그 한가운데에 고립되어 있다. 물리면 끝이다. 두 사람은 그 사실을 마음속 깊이 새겼다.

 

 

 

 

 

2.

 

감염자들은 지치지도 않는지 계속해서 사냥감을 찾아 돌아다녔다. 편의점 안의 불빛을 보면 몰려들 것 같아 두 사람은 전원 스위치를 찾아 실내의 조명을 모두 껐다. 

 

춥지는 않았지만 아직 초봄이라 문틈으로 새어드는 공기가 차가웠다. 게다가 전방으로 열린 냉장칸에서 흐르는 찬 기운이 계산대 안으로까지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안 그래도 승준은 하루 동안 겪은 일의 충격이 밤중에 한꺼번에 밀려들어 몸을 사시나무처럼 떠는 중이었다. 허리를 숙여 움직이는 데 도가 튼 효진이 능숙하게 매장을 가로질러 중앙 매대 끝에서 무릎담요와 핫팩 여러 개를 가지고 왔다. 

 

담요 포장을 뜯어 두 개를 바닥에 깔고 두 개는 몸을 덮은 뒤 핫팩을 주물럭대자 떨림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승준은 간헐적으로 꿈과 현실의 경계를 오가며 얕은 잠에 빠져들었다. 주위는 완연한 어둠뿐이었다. 가끔씩 들려오는 그어어, 하는 울음소리 같은 것이 바깥에 얼마나 많은 수의 감염자들이 돌아다니고 있는지를 알려주었다.

 

출입문 쪽에서 덜컹거리는 소리가 나 흠칫 놀라 잠에서 깼다. 효진은 아직 눕지도 않은 채로 벽에 기대 앉아 있었다. 쉿, 하고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 대는 효진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승준은 다시 바닥에 누워 눈을 감았다. 아마도 감염자 특유의 부자연스러운 움직임 때문에 걷다가 가끔 문에 부딪히는 듯했다. 

 

그나저나 효진도 피곤할 텐데, 조금이라도 자야 할 텐데. 생각하며 다시 스르르 잠에 빠졌다. 

 

그 다음 눈을 뜬 건 사위가 조금씩 밝아오는 새벽녘이었다. 눈을 떠 올려다보니 효진은 아직 벽에 기대앉은 채 살짝 눈을 감고 있었다. 자고 있는 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승준은 조심스레 몸을 일으켜 효진의 어깨를 흔들었다. 

 

“효진. 누워서 쪼끔 자. 무슨 일 있으면 바로 깨울게.”

“…….”

“너 아예 안 잤잖아.”

 

효진이 대꾸하지 않자 어깨를 붙잡아 무작정 제 무릎 위로 당겼다. 효진이 그제야 눈을 감은 채 그대로 몸을 내려 승준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분명 허벅지를 벤 것일 텐데 딱딱한 뼈가 느껴져서 웃음이 나왔다. 너 딱딱해서 뒤통수 아퍼. 그렇게 말하자 승준이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당황한 얼굴로 허둥댔다. 아닌데 나 살 많은데. 효진은 상체를 들어 승준이 누워 있던 담요 위로 머리를 옮겼다. 많긴 뭐가 많어, 뼈밖에 없는 게. 핀잔하듯 말하면서도 효진은 그가 왜 뼈밖에 없는 마른 몸을 하고 있는지 알았다. 데뷔해야 하니까. 언제든 데뷔조 구성에 들어갈 수 있게 다이어트는 필수고, 인식하지 못하는 스트레스도 겹쳐 밥을 먹으면 먹는 대로 몸 밖으로 빠지는 것이다. 

 

승준은 결국 면담은 하지 못한 셈이었다.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줘야 했다. 효진은 누운 채 눈을 감고 팀장에게서 들은 얘기를 전달했다. 

 

“다 다른 데로 갔대.”

“……?”

“우리 빼고 세 명 다. 계약 해지하고 다른 회사로.”

 

승준에게서는 아무 대꾸가 없었다. 나름 충격 받은 것이리라 생각했다. 데뷔 엎어지는 온갖 이유, 그중 새로운 하나를 또 겪게 된 것에 대한 충격. 눈을 감은 채 말을 이었다. 팀장님이 한 번만 더 자기 믿어보라고 그러더라. 이번엔 진짜 할 수 있다고. 너한테도 면담하면서 아마 그런 말 했을 거야. 졸음이 서서히 밀려왔다. 근데… 믿고 말고가 이제 의미 없어졌네. 팀장님은…. 또다시 눈앞에 광폭하게 저를 향해 달려오던 팀장의 얼굴이 떠올랐다. 

 

눈을 떠 몸을 돌리고 승준을 바라보았다.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십년지기 친구의 말간 얼굴이 빠르게 안정을 가져다주었다. 효진은 다시 상체를 꿈틀꿈틀 움직여 승준의 허벅지를 베고 누웠다. 

 

“딱딱하대매.”

“바닥이 더 딱딱해.”

“참나.”

 

승준이 손가락을 효진의 이마 위로 올려 흐트러진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효진이 절로 잠이 오는 듯 무방비한 얼굴을 했다. 

 

“일단 아무 생각하지 말고 자.”

“…….”

 

이따가 구조대 오면 빨리빨리 움직여야 할지도 모르잖아. 힘을 모아놔야지. 속삭이는 듯한 높은 톤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효진은 엄마 말 잘 듣는 소년처럼 순순히 잠에 빠져들었다. 

 

-

 

구조대는 오지 않았다. 목 빠지게 기다려 봐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구조대 비슷한 차량이나 헬기가 접근하는 소리는커녕 살아있는 사람의 목소리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이제 이 부근은 전부 감염자들에게 점령당한 듯했다. 

 

생존자가 있어도 어디엔가 꼭꼭 숨어 있겠지, 우리처럼. 두 사람은 기다리는 내내 교대로 컴퓨터 앞에 앉아 뉴스란을 새로고침하거나 SNS 타임라인을 살폈다. 설상가상으로 인터넷도 불안정해서 몇 시간에 한 번씩만 제대로 연결되었다. 

 

인터넷 페이지가 업데이트될 때마다 보이는 바깥세상의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고작 하루 만에 예상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퍼져나간 감염은 이미 서울 전역으로 확대되어 제대로 방어가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서울 이외의 지역으로 대피하려는 사람들로 인해 시내의 모든 도로는 차량들로 전부 꽉 막혀 있었고 설상가상으로 도로 한복판에서 감염자가 날뛰는 일이 빈번하게 벌어져 이동 자체가 불가능했다. 출국을 하려 몰려든 사람들 중에 감염자가 있던 탓에 공항은 폐쇄되었고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서울에서 조금이라도 더 떨어진 곳으로 옮겨 가기 위해 필사적으로 기차표를 구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전국적인 아비규환이었다. 동영상 사이트에 올라오는 실시간 영상들이 보여주는 상황은 더욱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주변 골목이 전부 어기적거리며 걸어 다니는 감염자들로 꽉 차 있는 모습을 옥상에서 찍은 영상, 아파트 단지 내 주차장에서 차에 타려던 사람이 엄청난 속도로 달려온 감염자에게 붙잡혀 속수무책으로 물어뜯기는 영상, 번화가 거리의 수많은 사람들이 공포에 질려 소리를 질러 대며 도망치고 그 뒤를 피투성이의 감염자들이 무섭게 따라붙는 영상. 그 어떤 것도 끝까지 보기가 힘들었다. 

 

SNS에는 욕하는 글, 한탄하는 글, 작별인사를 하는 글들이 유서처럼 업로드되고 있었다. 구조대가 올 거라는 희망을 하루치만큼 잃은 승준이 기력 없는 얼굴로 뉴스란을 클릭했다. 

 

[생존자 구조 실질적 대책 없어]

 

[서울시 대규모 감염병 사태가 만 하루째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중앙재난대책본부는 현재 서울 시내 각 지역 생존자들에 대한 구조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실질적인 대책은 미흡해 사실상 생존자 구조가 불가능한 것이 아니냐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등줄기가 뻣뻣해지는 것 같은 내용의 기사였다. 결국 생존자들이 각 지역에서 가장 높은 건물의 옥상으로 올라가 있으면 서울 상공을 지나던 헬기가 발견해 구조하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다고 쓰여 있었다. 그러나 그 높은 건물까지 가는 도중의 안전은 아무도 보장해주지 않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별 쓸모가 없는 방안이었다. 집 밖으로 나가는 순간 물어뜯길 확률이 훨씬 높았다. 

 

기사에는 집 안에 갇혀있는 생존자들의 악에 받친 댓글이 폭발하는 중이었다. 그러니까 아직 안 물린 사람들은 끝까지 알아서 살아남으라는 거네, 이게 무슨 대책이냐, 물려 죽거나 굶어 죽거나 둘 중 하나 택하라는 거잖아. 볼수록 한숨만 나와 승준은 브라우저를 내려놓고 직원실을 나왔다. 

 

효진은 계산대 뒤 벽에 기대앉아 착잡한 눈으로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밖에서 순찰하듯 배회하는 감염자들의 수가 하루 사이에 곱절은 늘어난 것 같았다. 게다가 분명 사냥감을 눈으로 보아야 인식하는 것 같았는데, 어두운 밤이 되면 오히려 움직임이 더 빨라지는 느낌이었다. 

 

“밤눈이 밝은가 봐.”

“…….”

 

아, 그 생각은 못 했는데. 옆에서 승준이 무심코 중얼거린 말에 효진이 입을 뻐끔 벌리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럴 수도 있겠다. 아무튼 해가 진 후 어두워지면 쟤들 눈을 피해 슬쩍 도망친다는 선택지는 쓸모없게 되었다. 

 

시간이 조금씩 더 지날수록 누군가 구하러 올 거라는 희망 역시 조금씩 깎여 나갔다. 하루가 지나자 인터넷이 완전히 먹통이 되었고, 또 하루가 지나자 기어이 전기가 끊겼다. 그럴 거라고 예상하고는 있었으나 막상 컴퓨터가 팟, 하고 꺼져 검은 화면이 되고 위잉거리며 돌아가던 냉장칸이 뚝 소음을 그치자 승준은 울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더 이상의 업데이트 없이 같은 내용의 기사만 계속 떠 있던 컴퓨터 화면이라도, 최소한의 인적같이 느껴져 위로받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조명은 원래 켜지 않고 지냈으나 직원실 안의 컴퓨터 불빛마저 없어지자 밤에는 한 치 앞을 디디기가 힘들었다. 냉장칸의 한기가 아직 남아 있는 동안 부패하기 쉬운 음식들을 먼저 가져다 먹었으나 남은 것들도 대부분 빠르게 맛이 변하기 시작했다. 애초에 냉장이 필요한 것들은 보관 기한이 짧은 음식들이었다. 

 

냉장칸 뒤 음료 창고에서 캔 음료들을 모두 빼고 만들어 놓은 화장실도 위생적으로 견디기가 힘들었다. 물 나오는 곳이 없으니 생수를 뜯어 몸을 씻는 수밖에 없었는데, 갈수록 마실 물이 줄어드는 걸 느끼고 나니 씻는 것조차 사치로 느껴질 정도였다.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푹신한 침대에 누워 잠들고 싶었다. 인간적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를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제일 견디기 힘든 것은 절망과 우울감에 집어삼켜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승준은 다른 무엇보다 효진이 텅 빈 눈을 하고 앉아있는 것을 볼 때 가장 괴로웠다. 

 

제 친구는 지금껏 단 한 번도 그런 눈을 한 적이 없었다. 어떤 괴로운 일이 있어도, 몇 년간의 노력이 단번에 물거품이 되어버리는 일을 겪어도 다가온 고난이 주춤 뒷걸음칠 만한 강렬한 눈으로 세상을 쏘아보는 아이였다. 그런 효진의 태도에서 저 자신도 많은 감명과 영감을 받았다. 남은 것이 죽음밖에 없는 상황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휩싸인 김효진의 모습 같은 건 보고 싶지 않았다. 

 

하루가 더 지났을 때 승준은 효진의 양어깨를 붙들고 말했다. 

 

“여기서 나가자.”

“…….”

“월드컵경기장에 생존자 대피소 있대. 거기루 가자.”

 

인터넷이 끊기기 전 본 기사에 틀림없이 그런 내용이 있었다. 서울에 있는 생존자 대피소의 목록을 나열해 놓은 기사였는데, 가장 가까운 곳이 월드컵경기장이었다. 아주 가까워서 도보로도 한 시간 만에 갈 수 있는 거리였다. 효진과 운동을 하러 자전거를 타고 오간 적이 많은 터라 길도 훤히 알고 있었다. 

 

“구조는 안 와.”

“…….”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어둠에 잠식되어 있던 눈동자가 빛을 발견한 듯 반짝였다. 여기 있으면 꼼짝없이 죽는 걸 기다리는 수밖에 없어. 어떻게 생각해 효진? 힘주어 설파하는 승준의 말을 듣는 동안 효진은 점점 또렷한 시선을 했다. 조그만 머리통 안에 새로운 목표가 반짝 떠오르고 있는 것을 발견한 승준이 만족스럽게 웃는 얼굴을 했다. 

 

우리 둘이 나가서 살 길을 찾자.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고만 있는 거 나 답답해서 못 하겠어. 효진이 눈을 두어 번 깜박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치?”

“어. 나가자.”

 

밖은 위험으로 가득 차 있지만, 아무 시도도 하지 않고 무기력하게 앉아 있는 것은 성미에 안 맞았다. 둘 다 그건 마찬가지였다. 죽더라도 살기 위해 끝까지 노력하다 죽고 싶었다. 

 

-

 

물론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만반의 준비가 필요했다. 무턱대고 나갔다간 1초 만에 잡혀서 게임 오버야. 둘은 머리를 맞대고 방법을 궁리했다.  

 

감염자들이 이미 죽은 사람들이라는 것이 틀린 말은 아닌 듯, 그들은 이제 썩어가는 살을 늘어뜨리고 걸어 다녔다. 사람의 형상이랄 것이 없어지자 오히려 대비하기는 편했다. 뇌를 파괴해야 죽는다고 했어. 머리를 공격해야 돼. 그러나 막상 대걸레 자루에 선반에서 빼낸 단단한 철심을 연결해 창처럼 만들고 나자 이걸 누군가의 머리에 찔러 넣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니면은, 일단 이거를 밑으로 휘둘러서 다리를 공격하자. 그래 그게 낫겠다. 맨 처음 상훈이 형에게 승준이 썼던 방법이었다. 

 

확실히 의욕이 돌아온 효진은 월드컵경기장까지 가는 길을 종이 위에 그려 보고 신중하게 경로를 정했다. 괜히 큰길 쪽으로 틀어서 진로가 막힐 바에는 처음부터 무조건 직진으로만 뚫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여기까지는 무조건 그냥 직진하면 돼. 길 잃을 위험도 없어, 알았지. 응. 

 

승준은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일단 사물함에 들어 있던 아르바이트생의 백팩을 꺼내 안을 비우고 생수부터 차곡차곡 담았다. 그 다음은 보관이 쉽거나 오래 먹을 수 있는 음식들. 멸균 포장된 핫바나 소시지, 치즈 스틱, 에너지 바, 초콜릿, 유통기한이 몇 년짜리인 작은 과자들―야 후렌치파이도 챙겨―알았어. 그리고 생필품들. 여행용 세면도구, 구급약품, 티슈, 속옷―효진 팬티 몇 개 챙길까?―말이라고 하냐?―알았어어―최대한 많이. 계산대 밑에 깔았던 담요 하나까지 넣고 나자 백팩은 빵빵해져서 포화상태였다. 

 

월드컵경기장까지의 코스를 표시한 지도 두 장을 들고 온 효진이 가만히 가방을 바라보다 다시 매대 끝으로 갔다. 대형 다회용 쇼핑백 안에 담요 두 개를 더 넣고 핫팩, 충전기, 박스테이프, 라이터, 긴 케이블 선들, 그리고 접이식 과도를 챙겨 넣었다. 

 

“잠깐만.”

“또 뭐 넣을 거 있어?”

“아무튼 전염병도 세균이니까… 무기가 되지 않을까?”

 

승준이 매대를 뒤져 찾아온 것은 분사형 살균소독제였다. 효진이 생각도 못 해봤다는 듯 오오, 하고 감탄하는 소리를 냈다. 역시 아이디어맨. 승준이 의기양양하게 그 다음 아이템을 들고 왔다. 아이돌 연습생이 관리를 게을리 하면 안 되지. 면도기와 바세린 멀티밤을 자랑스럽게 꺼내는 두 손을 턱턱 쳐 내려놓게 한 효진은, 아니다 그냥 넣자, 하고 결국은 두 개를 다 챙겼다. 

 

빵빵해진 다회용 쇼핑백의 맨 윗부분을 비닐봉지로 싸맨 다음, 박스테이프로 봉하고 케이블 선으로 감아 팔을 낄 공간을 만들자 훌륭한 백팩이 되었다. 이거를 내가 멜게, 저거를 너가 메. 그 다음 포장용 뽁뽁이를 박스 위에 여러 겹으로 둘러 팔과 다리에 각각 낄 수 있는 안전장비를 만들었다. 반팔 티셔츠 차림이었던 승준은 알바생의 얇은 바람막이도 입기로 했다. 여기에 마지막으로 작업용 목장갑까지 끼고 나면 밖으로 나설 차림이 완성되는 것이다. 

 

“자 이제….”

“저길 어떻게 뚫고 나가냐.”

 

준비는 다 했는데, 나갈 방법이 없어 막막했다. 벽 뒤에 숨어 몰래 바깥을 내다보며 둘은 감염자들의 특성에 관해 추리했다. 일단 눈으로 봐야 쫓아오는 건 맞고. 소리가 크게 나도 반응하는 것 같지. 지난 며칠간 빛을 없애고 소리를 죽이며 생활한 것도 그 이유 때문이었다. 

 

밤에 더 움직임이 빨라지는 건 여러 날의 관찰로 확실해졌다. 낮에는 안 들리던 비명소리도 밤이면 한두 번씩 들려오곤 했던 것으로 보아 밤에 더 활발해지는 게 맞는 것 같았다. 그럼 작전 시간은 낮으로 확정. 

 

큰 소리가 나는 물건을 밖으로 던져 유인한 후 반대쪽으로 달려가면 되지 않을까? 여러 방안을 내 봤지만 그 의견이 가장 합당하게 여겨졌다. 다만 바로 잡혀 버리면 끝이니까, 한 번에 제대로 주의를 끌어야 돼. 어딘가 숨을 수 있는 곳이 있는지 알 수 있다면 좋겠지만, 지금은 바깥 정보를 얻을 수 없으니 일단 무작정 뛰는 걸 기본으로 하고 임기응변을 발휘하는 수밖에 없었다. 

 

‘소리 나는 물건’은 편의점 창고와 매대에서 몇 개 발견할 수 있었다. 

 

[성탄트리토이]

[해피웨딩카]

[헤엄치는 아기 상어]

 

성탄트리토이는 누르면 캐롤이 나오는 트리 모양 인형인데 소리가 너무 작아서 감염자는커녕 지나가는 개미도 못 들을 것 같아서 반려됐다. 헤엄치는 아기 상어는 물속에서 소리를 내며 움직이는 장난감이었는데 여긴 육지니까 이것도 반려. 남은 건 해피웨딩카 하나였다. 

 

해피웨딩카는 무려 길이 30센티미터에 달하는 초대형 미니카로, 겉면에 화려한 분홍과 보라색 꽃 장식이 되어 있고 밖으로 열 수 있는 문도 다섯 개나 달려 있었다. 건전지를 넣고 앞문을 열면 화려한 색상의 불빛과 행복한 웃음소리가 나며 윗부분의 버튼을 누르면 결혼행진곡이 나온다고 쓰여 있었다. 

 

“뭐야 이거? 짱 멋있다.”

 

게다가 뒤로 당겼다 놓으면 엄청난 추진력으로 앞으로 굴러가기까지 했다. 완전히 웨딩카에 홀린 승준은 건전지를 넣지 않은 상태로 다섯 개의 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며 한참을 심취하여 갖고 놀았다. 편의점에서 발견할 수 있으리라 생각지 않았던 퀄리티의 물건에 효진 또한 잠시 어안이 벙벙했다. 

 

그럼 이걸로 하자. 실행 시간은 내일 낮 두 시, 관찰 결과 감염자들의 기동력이 가장 느려지는 시간대였다. 

 

-

 

결전의 시각, 공들여 만든 안전장비를 착용하고 백팩을 멘 두 사람은 끝에 철심이 달린 대걸레 자루를 각각 한 손에 든 채 유리문 옆 벽에 비장하게 앉았다. 작은 사거리를 지나다니는 감염자들의 운동 능력은 확실히 밤에 비해 절반 정도로 떨어져 있었다. 그래도 여전히 빠르다는 건 이미 겪어봐서 알고 있었다. 

 

조심해야 돼. 효진이 몇 번씩 그렇게 당부했다. 

 

“나가면 절대 뒤돌아보지 말고 달려.”

“오키.”

 

유리문을 가리고 있던 박스를 조심스레 치워내자 감염자 하나가 움직임을 감지하고 다가왔다가 사람이 보이지 않자 그대로 어슬렁거리며 지나쳐 갔다. 이제 건전지를 넣은 해피웨딩카를 밖으로 굴릴 차례였다. 

 

속도와 방향과 타이밍, 세 가지 요소가 모두 정확하게 맞아 떨어져야 하는 중요한 작업이었다. 운동신경이 좋고 조금 더 날렵한 승준이 이 중대한 임무를 맡기로 했다. 

 

하나 둘 셋. 웨딩카의 앞문을 열고 윗부분 버튼을 누른 승준이, 효진이 유리문을 살짝 당겨 연 타이밍에 맞춰 뒤로 굴렸다가 반동을 주듯 힘껏 놓았다. 오색 빛깔의 조명과 정체 모를 여자의 행복한 듯한 웃음소리에 결혼행진곡을 끼얹은 해피웨딩카가 두 시 방향으로 직진하기 시작했다. 

 

영문을 모른 채 우왕좌왕하던 사거리의 감염자들이 오른쪽 길 한가운데 안착한 해피웨딩카를 향해 쏜살같이 달려든 순간, 효진과 승준은 문을 밀어 젖히고 단번에 왼쪽으로 튀어 나갔다. 

 

심장이 터질 것같이 뛰고 머리가 웅웅거렸다. 하지만 이제 돌이킬 수는 없었다.

 

있는 힘을 다해 골목을 내달리는 두 사람의 등 뒤로 산뜻한 멜로디의 결혼행진곡이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