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세상에서 이루어진 꿈에 관한 이야기 中 - 독
23-03-01 23:53

 

 

3.

 

“달려, 계속 달려! 쭉 가! 멈추지 마!”

 

큰 소리를 내면 안 된다는 건 알고 있지만, 이렇게 외쳐서라도 사기를 돋우지 않으면 발이 멈춰 버릴 것 같았다. 그만큼 전속력으로 오래 달리고 있었다. 한 블록 정도를 벗어났을 때부터 양쪽 골목에서 튀어나온 감염자들이 하나둘씩 불어나며 뒤를 쫓아오는 중이었다. 

 

앞에서 튀어나오는 것들은 대걸레 자루로 발목을 휘둘러서 엎어뜨린 후 달리면 된다지만 뒤에서 물귀신처럼 뻗어 오는 손을 피하는 방법은 따로 없었다. 무조건 빨리 달리는 수밖에. 

 

승준아 조심해! 감염자 하나가 옆 골목에서 뛰쳐나와 승준에게로 달려들었다. 잡아채이기 전 재빨리 몸을 숙인 승준이 대걸레 자루를 아래로 휘둘러 감염자의 발목을 쳐 거꾸러뜨렸다. 머리를 땅에 박은 너덜너덜한 몸뚱이가 허우적대는 사이 쏜살같이 앞으로 튀어 나간 승준이 효진과 나란히 뛰며 소리쳤다. 

 

“효진! 나 죽을 거 같애!”

“야 씨, 나도! 아오, 미친!”

“어디, 좀 들어가, 들어가자. 쫌 쉬자!”

 

메고 있는 가방의 무게 때문에 안 그래도 지친 몸이 더 축축 늘어졌다. 이대로 속도를 더 내지 못한다면 금방 뒤에서 바짝 따라붙는 손에 잡혀 버릴 것이다. 

 

한 발 더 앞으로 나가 골목 양옆에 늘어서 있는 상점 문을 밀어 보던 승준이 여의치 않은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리 열려 있는 문이라도 안에 감염자가 없는지 확인하지 않는 이상 함부로 들어갈 수도 없었다. 

 

안전하게 쉴 만한 곳을 찾아 두리번거리던 두 사람의 앞으로 검은 눈을 부릅뜬 감염자 둘이 양쪽에서 하나씩 튀어나와 달려들었다. 아오, 쫌 제발! 두 사람은 동기화라도 된 듯 동시에 똑같은 포즈로 몸을 숙여 대걸레 자루를 움켜쥐고 휘둘렸다. 효진과 승준에게 각각 발목을 맞은 둘도 똑같은 포즈로 바닥 위를 굴렀다. 

 

뒤를 돌아보니 방금 처리한 이들이 바닥을 가로로 뒹굴어준 탓에 쫓아오던 무리의 발걸음이 조금 엉킨 모양이었다. 이럴 때 빨리 숨어들어야 하는데. 다시 앞을 향한 효진의 팔을 승준이 다짜고짜 오른쪽으로 잡아끌었다. 

 

“뭔데?”

“그냥 와!”

 

파란 천으로 둘러싸인 공사 현장과 가구점 사이의 좁은 틈에 건축 자재들이 아무렇게나 쌓여 있었다. 고무 양동이와 나무 패널, 대리석, 타일이 얼기설기 놓인 곳의 입구에는 커다란 현관 문짝이 널브러져 나뒹구는 중이었다. 

 

효진을 질질 끌어 그 틈의 중간으로 밀어 넣은 승준이 뒤이어 저도 재빨리 비집고 들어간 다음 문짝으로 입구를 막았다. 반대쪽이 막혀 있어 만약 이곳으로 공격이 몰린다면 위험하겠지만, 일단 현관문으로 가려 놓으면 안 보이는 데다 건축 자재들 때문에 곧장 둘에게 손이 닿지는 않을 터였다. 

 

터질 듯 차오르는 숨을 소리 안 나게 몰아쉬느라 두 사람은 몸을 덜덜 떨었다. 열이 올라 뜨거워진 몸을 딱 붙이고 땀을 비 오듯 흘렸다. 잠시 후 우다다다다, 하고 뒤따라오던 무리의 발걸음으로 추정되는 소리가 문짝 바로 옆을 스쳐 지나갔다. 휴우, 하는 안도의 한숨이 앞다투어 튀어 나갔다. 

 

일단 좀 쉬자. 입모양으로만 말한 승준이 대리석과 사다리 사이의 공간에 동그마니 주저앉았다. 잠시 숨을 좀 더 고르던 효진 역시 가방을 내리고 합판 위에 걸터앉았다. 

 

백팩 안에서 꺼낸 작은 생수 한 병은 둘이서 몇 모금 만에 텅 비워 버렸다. 빈 페트병을 가방 안에 집어넣은 승준이 주위를 둘러보며 손짓 발짓과 입모양으로 질문을 전달했다. 근데 이제,

 

‘어떻게 나가지?’

 

효진도 막 그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쉴 만한 곳을 기가 막히게 찾아내긴 했는데, 당연히 뒷일까지는 생각할 틈이 없었을 것이라. 지금으로선 한 명이 뒤에서 대걸레 자루로 엄호하면서 현관 문짝을 옆으로 치우고 나가는 수밖에 없지만, 만약 다른 감염자들이 근처에 몰려 있다면 주의를 끌게 되어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이곳은 등 뒤가 막다른 공간이라는 큰 위험 요소가 있는 데다 건축 자재들을 넘어야 해서 나가는 시간 자체도 오래 걸렸다. 

 

그 때 승준이 앉아 있는 자리 뒤쪽에 가로로 길게 누워 있는 사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혼자서는 들고 나가기 힘들 만한 길이의 철제 사다리였다. 하지만 중간 부근의 칸 두 개에 한 명씩 들어가 무게를 지탱한다면 누워 있는 모양 그대로 나를 수 있을 것 같았다. 

 

최대한 목소리가 안 나게 작전을 설명하는 동안 승준도 앉은 자리에서 바디랭귀지를 동원하여 알아들었다는 표시를 해주었다. 일단 문짝으로 막아 놓은 틈 밖을 조심스럽게 살핀 후 고무 양동이 뚜껑을 바닥에 던진다. 편의점에서 가지고 온 케이블 선을 사다리에 연결해 대걸레 자루를 끼워놓는 고리를 만든 다음, 가방을 메고 사다리를 조심조심 들어 뚫린 부분을 몸에 끼운다. 그다음 앞으로 돌진. 

 

현관문 문짝은 어쩔 도리 없이 앞으로 넘어지게 되지만 고무 양동이 뚜껑이 소음을 흡수해 그렇게까지 큰 소리는 나지 않았다. 대걸레 자루를 고리에 끼워 넣어 직접 쥐고 이동할 필요를 없앤 터에 두 손이 자유로웠다. 

 

조금 거리를 두고 각각 사다리의 몸체를 두 손으로 받친 채 두 사람은 다시 앞을 향해 내달렸다. 온몸을 물리적으로 둘러싸고 있는 보호기구가 있는 것만으로도 한층 더 패기 있게 달릴 수 있었다. 게다가 함께 온갖 연습을 해온 세월이 있어―데뷔 후를 위해 만들어진 두 사람만의 전용 안무도 있었다―흡 하면 헛 하고 손발도 척척 맞았다. 감염자가 앞을 막아서면 효진이 사다리를 틀어 승준이 지탱해주는 형태로 휘두르고, 뒤에 따라붙으면 승준이 틀어 효진이 지탱하는 형식으로 휘둘러 쳐냈다. 

 

강한 공격력이 생기자 전속력으로 달릴 필요가 없어져 오히려 편했다. 당초 계획했던 것보다는 현저히 느렸지만 그래도 꽤나 먼 거리를 전진할 수 있었다. 조금만 더 가면 큰길 쪽으로 꺾어지는 코스였다. 

 

사다리를 허리춤에 끼고 칙칙폭폭 달리던 두 사람은 삼정구청역 자전거 보관소 앞이 텅 비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무도 없어 큰길로 꺾기 전 전열을 정비하기 적당해 보였다. 다만 왜 그곳에는 감염자들이 없는지 궁금할 따름이었다.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니 자전거 보호소 오른쪽에 큰길을 향해 오르는 계단이 나 있었다. 계단 너머에서 그르르, 하는 감염자 특유의 목 긁는 소리가 거대한 진동처럼 들려왔다. 얼마나 많은 개체가 모여 있는 건지 가늠할 수도 없었다. 

 

“전부 저쪽으로 이동한 건가?”

 

그래서 여긴 아무도 없나 봐. 승준이 조심스럽게 숨을 몰아쉬며 속삭이듯 말했다. 근데 좀비도 계단을 올라가나? 마찬가지로 밭은 숨을 작게 내뱉으며 효진이 대답했다. 기어 올라간 거 아니야? 아. 이곳에 당도하면 바로 위쪽에서 동류 무리가 만들어내는 울음소리가 들린다. 그러면 다들 그곳에 합류하기 위해 계단을 기어 올라간다. 그렇게 가정하면 여기에만 감염자가 없는 이유가 납득되었다. 

 

“모여 있으려고 하는 건가 봐.”

“그게 더 공격력이 세니까?”

“머리 좋네.”

 

머리를 써서 움직이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효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제가 해 놓고도 편히 웃을 수 없는 농담이었다. 

 

어느덧 해가 저물 시간이었다. 케이블형 자물쇠에 묶여 일렬로 늘어서 있는 자전거들을 기준으로 왼쪽에는 조그만 아파트 단지가 있었다. 그 앞에 경비실로 쓰이는 듯한 작은 컨테이너 박스가 보였다. 혹시 몰라 사다리를 뒤집어쓴 채 대걸레 자루를 이용해 창문을 열자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여기서 쉬었다가 이동하자.”

 

문이 잠겨 있어서 창문을 통해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승준이 사다리를 들고 방어 태세를 갖추고 있는 동안 효진이 먼저 창문을 열고 안으로 넘어 들어갔다. 창문 밖으로 손을 뻗은 효진이 사다리를 잡고 주위를 살피는 동안 승준도 창문을 타 넘었다. 붙잡고 있던 사다리는 둘이서 같이 창문 안으로 끌어당겨 들여놓았다. 밖으로 나갈 때 꼭 필요한 장치였기 때문에 소중히 지켜야만 했다. 

 

열린 창문을 하나씩 단단히 닫고 잠금장치까지 한 다음,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신문지를 유리창 위로 꼼꼼히 붙여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도록 했다. 혹시나 출입문이 열리지 않는지도 단단히 점검해 보고 숨을 돌렸다. 

 

컨테이너 안은 둘이서 누우면 대충 딱 들어맞는 정도의 공간이었다. 더 넓지 않아 오히려 안정감이 들었다. 어깨에 메고 있던 짐을 내려놓고 털썩 주저앉으니 그제야 하루 종일 달린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생각해 보면 한 번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죽음의 질주를 몇 시간 내내 했던 터였다. 그 사실을 실감하고 나자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당장 손 뻗으면 잡힐 법한 거리에서 까만 눈을 부릅뜨고 미친 듯이 뒤를 쫓아오던 얼굴들이 망막에 맺혀 떠나지 않았다. 

 

“그래도 용케 안 잡히고 여기까지 왔다 그치.”

 

승준이 작은 목소리로 말하며 가방에서 담요를 꺼내 바닥에 주섬주섬 깔았다. 이거 봐, 나 손도 완전 엉망이야. 담요의 까슬한 면 때문에 쓰라림이 느껴져 깨달았다. 손바닥 한가운데 길게 상처가 나 있었다. 효진이 화들짝 놀라며 승준의 손을 잡아챘다. 

 

가려놓은 창문 틈으로 스며드는 빛으로는 너무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았다. 라이터를 꺼내서 불을 켜 비춰 보자 오른쪽 손바닥이 가로로 깊게 찢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아 씨… 야. 효진이 날카롭게 얼굴을 찌푸렸다. 아마도 앞에 나타난 감염자를 처치하느라 사다리의 방향을 틀었을 때 어딘가 튀어나온 부분에 긁힌 듯했다. 이 정도면 장갑 안쪽도 피로 축축할 것 같았다. 

 

효진이 가방에서 구급용품을 꺼내 다가앉는 동안 승준은 살벌해진 효진의 눈치를 보며 짐짓 눙쳤다. 그래두 내가 뒤에서 제대로 지탱해가주구 오늘 한 열댓은 쓰러뜨렸다, 맞지. 

 

“참 나….”

“아야야, 살살 해줘 효진.”

 

목소리를 크게 낼 수 없어서 신음도 속삭이듯 내는 와중에 제 활약을 자랑하며 분위기를 풀려는 노력을 모르지 않았다. 효진은 어쩔 수 없이 웃으면서 그래 너가 오늘의 엠브이피다, 하고 불퉁하게 호응했다. 

 

“…조심해야 돼.”

 

뉴스에서 그랬잖아. 혈액에 침투해서 감염된다구. 이렇게 상처 난 데 감염자 체액 들어가면은, 그러면은. 그냥 끝이야. 심각하게 중얼거리며 상처 위로 살균소독제를 뿌린 효진이 연고를 짜 꼼꼼히 펴 바르고 손바닥을 빙 둘러 붕대를 감았다. 이 와중에 소독제를 챙겨온 승준의 발상에 마음 깊이 감사했다. 원래는 무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챙겼던 거지만. 1초도 아까운 급박한 상황에서 효과가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신무기는 꺼낼 수조차 없었다. 대신 상처를 소독하는 본연의 역할에 충실했으니 그걸로 되었다. 

 

가방을 뒤져 유통기한이 얼마 안 남은 핫바와 빵을 꺼내 먹고 몸을 담요로 덮은 승준이 바닥에 모로 누워 웅얼거렸다. 효진 나 너무 졸려. 

 

“어, 자.”

 

괜스레 퉁명스러워진 효진이 구급용품 상자를 닫아 다시 가방에 챙겨 넣으며 대답했다. 어차피 오늘은 더 못 움직여. 해가 지고 나면 감염자들의 움직임이 배로 빨라질 것이다. 의지할 조명도 없는 밤에 큰길로 나가는 건 미친 짓이나 다름없었다.

 

오늘은 어쩔 수 없이 여기서 밤을 나고, 내일 날이 밝으면 다시 출발해야 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승준은 색색 숨소리를 내며 곯아떨어졌다. 

 

하여간 아무데서나 잘도 자. 효진이 힐긋 쳐다보고 혀를 내둘렀다. 물론 옆에 지키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안도감에 극한까지 치달았던 긴장이 풀린 탓이겠지만. 아무리 승준이라도 좀비 밭에서 안전이 보장되지 않은 상태로 잠들 수는 없을 테니까. 효진은 아주 작은 뿌듯함을 느끼고 입꼬리를 삐죽였다. 

 

옆으로 누워 얇은 담요에 머리를 대고 새근거리며 잠들어 있는 얼굴이 강아지 같았다. 무심코 얼굴 가까이로 향하려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쓰다듬을 뻔했다. 남자끼리, 친구끼리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또 무심코. 

 

사실 그와 자신이 온전한 친구인지에 대해서 의문을 가진 지는 꽤 되었다. 아무리 숨기려 해도 눈만 보면 저절로 속마음이 들여다보이는 터에 서로가 서로에게 매일 숨기고 매일 들키는 상황이었다. 말을 애써 입 밖으로 내지 않을 뿐. 

 

극도의 불안감에 시달리는 건 굳이 좀비 때문이 아니더라도 마찬가지였다. 인생을 걸고 있는 것이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얇은 동아줄이라면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거기에 너무 오래 같이 매달려 있었다. 그러나 함께 견뎌왔기 때문에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전적으로 의지하는 마음이 우정의 수치를 넘어 버린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효진은 가방을 반듯하게 정리하고 승준의 옆자리에 바른 자세로 누웠다. 몸을 옆으로 돌려 자는 얼굴을 보고 싶다는 욕심이 들었다. 세상모르고 자고 있을 테니 살짝 훔쳐보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고개를 돌리자 아니나 다를까 승준은 코까지 작게 골며 곤히 잠들어 있었다. 평소에는 커다랗게 뜨여 쉴 새 없이 반짝거리는 큰 눈이 감겨 있을 때는 긴 속눈썹을 드러내고 얌전해진다는 게 신기했다. 그 밑으로 보이는 날렵하게 뻗은 곡선의 콧잔등이라든지, 오밀조밀하게 빚어진 얇은 입술이라든지. 효진은 팔을 들어 검지로 허공에서 승준의 얼굴선을 몇 번 따라 그렸다. 

 

꿈속에서도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는 건지, 잠든 와중에도 승준이 살짝 얼굴을 찌푸리고 알 수 없는 말을 웅얼거렸다. 팔을 뻗어 붕대가 감겨 있는 손을 가만히 감싸듯 덮어 쥐었다. 

 

이 모든 일이 시작된 첫날에 승준이 울상을 지으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효진 너 아니었으면 나…. 그 말을 들으면서 했던 생각을 그대로 전해주면 너는 뭐라고 대답할까. 

 

나야말로 너 아니었으면…. 

 

-

 

승준이 문득 눈을 떴을 때 바깥은 한밤중인 듯 새어 들어오는 빛 하나 없었다. 멀리서 수십, 수백 명쯤 되는 듯한 감염자들의 울음소리가 악몽처럼 들려올 뿐이었다. 어둠에 익숙해진 시야 안에 효진의 얼굴이 제일 먼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을 것이다. 

 

효진은 눈을 감고 있었지만 깊게 잠든 것 같진 않았다. 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깊이 잠들어 있는 효진을 수없이 많이 지켜보았다. 이런 단정한 얼굴로 누워 있는 건 선잠에 들었을 때뿐이라는 걸 당연히 알고 있었다. 

 

안쓰러운 마음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이렇게 불안한 상황에서 제대로 잘 수 있는 성정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아마 한시도 허투루 쓰지 못하고 바깥 상황과 위험 요소를 고민하고 있을 터였다. 게다가 함께 있는 저를 지켜줘야 한다는 책임감도 갖고 있겠지. 

 

서로를 지키고 싶어 하는 건 둘 다 마찬가지였지만 저에 대한 효진의 다정은 꼭 범람할 것처럼 위태로운 데가 있었다. 조금만 더 흔들면 흘러넘쳐 둘 모두를 흠뻑 적실 것 같은 그 거대한 다정을 승준은 항상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보곤 했었다. 

 

“효진.”

“…….”

 

가만히 이름을 부르고 중얼거린다. 이렇게 절박한 상황에서도 우린 또 같이 있구나. 정말 운명공동체인가 보다. 아닌 게 아니라 가끔은 저희 둘을 둘러싼 모든 것이 운명인 것처럼 느껴지곤 했다. 큰 인력이 두 사람을 떨어지지 못하게 붙들어 놓아,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궤도를 돌게 만드는 것 같다고. 있잖아, 효진.

 

“사실 나도 받았어. 스카웃 제안.”

“…….”

“거기서 오라고 하더라구 나두.”

“…….”

“근데 안 갔어.”

 

너랑 데뷔하고 싶으니까. 그러지 않으면 의미가 없으니까. 

 

아마 회사 사람들은 제가 어딘가로 내뺄 거라는 걱정은 조금도 하지 않았을 거였다. 다들 이미 이승준이 이곳을 떠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눈치챘을 테니까. 아 승준이? 괜찮아, 걔는. 김효진 있으면 절대 안 나가. 언젠가 신인개발팀 직원들끼리 그렇게 주고받는 말을 들었다. 저에 대한 관심이나 대우가 상대적으로 소홀한 것 같다고 느끼면서도 그 이유를 알아 아무 말 하지 못했다. 나는 효진이 없으면, 너와 같은 꿈을 꾸고 같이 이루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으니까. 그게 제 약점이 된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반듯하게 누워 감겨 있던 효진의 눈꺼풀이 조금 떨리는 것 같다고 생각했을 때, 다물린 입술 사이로 잠긴 목소리가 웅얼거리듯 튀어나왔다. 

 

“…나가 버리지 그랬어. 나도 확 따라 나가게.”

 

깜짝 놀라 눈을 빠르게 깜빡이던 승준이 곧 재미있다는 듯 소리 죽여 웃었다. …그러게. 그랬으면 진짜 웃겼겠다. 여기서 만든 데뷔조, 그대로 저기서 데뷔. 배를 잡고 누워 뒹굴던 승준이 힘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근데 거긴 너 안 데려갔을걸. 

 

효진만 스카웃 제의를 받지 않은 건 그가 능력이 부족하거나 효용성이 없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였다. 포지션이 너무 확실하게 자리 잡혀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인재는 빼앗기 힘들다. 아무도 쉽게 놓아주려고 하지 않으니까. 모험이 되는 것이다. 

 

“날 너무 좋아하네.”

 

효진이 머쓱한 듯 불쑥 그런 말을 내뱉었다. 주어를 확실히 알 수 없는 말이었다. 회사가, 아니면 이승준이. 당연히 전자이겠거나 짐작하면서도 승준은 불쑥 치솟는 기대를 억누르지 못했다. 그래서 저도 주어를 내뱉지 않고 받아쳤다. 당연하지. 

 

“좋아하지도 않는 애랑 어떻게 몇 년이나 같이 연습하냐.”

 

너무 반칙이었나. 선을 넘었나. 효진에게서 아무 대꾸가 들려오지 않자 걱정이 되었다. 영겁 같은 몇 초의 시간 후 효진이 들릴 듯 말 듯 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고마워.”

 

뭐에 대한 고마움인지는 알 수 없었다. 저를 두고 다른 회사로 가지 않아 주어서 고맙다는 것인지, 몇 년이나 같이 연습할 만큼 좋아해줘서인지. 다만 지금은 효진도 그런 말밖에 할 수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알면 됐어.”

 

그리고 고작 이 정도 대답이 승준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

 

가려 놓은 신문지 틈으로 아침 빛이 새어 들어왔다. 간밤에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해 둘 다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부스스 일어나 앉아서 서로 얼굴을 보고 삿대질을 해 가면서 웃었다. 웃음소리를 크게 내지 못해 끅끅대느라 배가 아팠다. 

 

오늘부터는 큰길로 나가 도로를 끼고 이동해야 했다. 어제 본 대로라면 자전거 보관소 옆 계단 위로 이어진 큰길에는 감염자들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모여 있어 뚫고 나가기가 쉽지 않을 터였다. 경비실 안 이면지에 월드컵 경기장까지의 지도를 다시 그린 효진이 도로변에 빽빽하게 늘어서 있는 건물을 이용하여 이동하는 방법을 제안했다. 

 

어제 관찰해본 바로는 감염자들은 저들끼리 집합하려는 습성이 있는 듯했다. 사방이 뚫린 넓은 공간에서는 최대한 많은 수가 모여 뭉쳐 다니는 경향이 있었다. 덕분에 그런 곳에는 사각지대가 존재했다. 최대한 모습을 노출시키지 않으며 이동한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을 것 같았다. 

 

승준이 사다리를 든 채 대기하고, 효진이 컨테이너 문을 열어 밖을 살폈다. 큰길로 이어지는 마지막 골목이라서인지 확실히 아무도 없었다. 무사히 밖으로 나선 두 사람은 가방을 메고 다시 사다리에 몸을 꿴 다음 큰길로 연결된 계단 아래로 향했다. 

 

계단을 반쯤 올라 내다본 삼정구청역 교차로는 대피하려던 것으로 보이는 차량들로 꽉 찬 상태였다. 물론 안에 타고 있는 사람은 없어 보였다. 어디론가 도망쳤거나 도로 한복판에서 물렸거나, 안전벨트에 묶인 채 좀비로 변해 있겠지. 시동이 걸린 채 버려져 있는 차가 있어도 애초에 도로로 이동을 할 수 없기에 무용지물이었다. 

 

“히익.”

 

교차로 너머에 대량의 감염자들이 몰려 있는 것이 보였다. 척 봐도 몇백 명은 되어 보였다. 어마어마한 숫자에 승준이 소스라치게 놀라 기겁했다. 저 사람들이 다 어디 있다 몰려나온 거야. 

 

감염되지 않았으면 다들 이 주변 어디에선가 일하고 밥 먹고 놀고 웃고 있었을 사람들. 승준이 눈을 떼지 못하고 개미 떼처럼 꿈틀거리는 감염자 무리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의 어깨를 툭툭 친 효진이 뒤쪽을 가리키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 다시 내려가자. 

 

이제 직선으로 달리는 것이 아니라 건물과 건물을 건너다니며 이동해야 했기 때문에, 사다리에 몸을 꿴 채로는 움직일 수 없었다. 어딘가에 부딪힐 때마다 울리는 소음도 위험 요소였다. 

 

“안녕, 고마웠어.”

 

끼워놓은 대걸레 자루를 빼고 계단 아래에 사다리를 버리며 승준은 어제 하루 동안 쓸모를 다해준 기특한 철제 기동 장치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최대한 몸을 웅크리고 발소리를 죽인 채 계단을 오른 두 사람은 시야에 보이는 바로 옆 건물로 이동해 출입문 옆 벽에 몸을 붙이고 숨었다. 애초에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안에 무엇이 있을지 모르는 출입문은 섣불리 건드리지 않는 편이 좋았다. 

 

도로변에 나 있는 건물들 사이로 몸을 숨기며 몇 건물인가를 지나, 어느 상가의 뒤편 비상구 앞에 섰을 때였다. 감염자 한 명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사다리를 빼고 이동한 후로는 처음 닥친 위험이었다. 

 

“……!”

 

다리가 불편해 큰길에 합류하지 못한 노인 감염자인 듯했다. 효진과 승준은 대걸레 자루를 휘두르는 대신 빙 돌아 옆 건물로 도망치는 것을 택했다. 그러나 잘 움직이지 않는 다리 때문에 제대로 속도를 내지 못하는 대신 노인 감염자는 계속해서 괴성을 질러댔다. 

 

그어억, 가악, 가아아아악!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듯한 고함이었다. 아니, 할아버님 발성이 너무 좋으신 거 아니야? 말한 승준조차 제가 뭐라 말했는지 모를 만큼 정신없었다. 

 

“어떡해, 다 들키겠다.”

 

이런 큰 소리가 모여 있는 감염자 집단의 주의를 끌지 못하는 것이 더 이상했다. 움직임을 멈추고 건물 뒤에 숨어 있는 동안에도 괴성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승준의 얼굴이 점점 하얗게 질려갔다. 백 명은 가뿐히 넘는 듯한 까만 눈의 무리가 일제히 이동하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등줄기에 소름이 오싹 끼쳤다. 

 

효진은 필사적으로 몸을 움직여 다음 건물, 다다음 건물을 넘겨다보았다. 텅 빈 상가 건물 1층에 유리문이 열린 곳이 있었다.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어 잘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억지로 디뎌 승준에게로 돌아온 효진은 붕대 감은 손을 덥석 쥐고 다짜고짜 끌어당겼다. 

 

목표물을 인식한 감염자들은 건물과 건물 사이의 틈으로 비집고 들어오기 위해 제 몸을 사리지 않았다. 출입문이 열려 있는 상가 건물로 이동하는 중간 지점에서 두 사람은 그들에게 정확히 포착되었다. 

 

너무 압도적인 것을 보면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을 승준은 난생처음 경험했다. 효진이 거센 힘으로 승준을 이끌고 달려 건물 유리문 안으로 밀어 넣고, 들어서며 등 뒤로 힘껏 문을 닫았다. 문틈이 좁혀지자마자 셀 수 없는 수의 감염자들이 문 벽에 달라붙어 유리 표면을 가득 채웠다.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던 승준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효진의 발치로 몸을 숙여 잠금장치를 돌렸다. 양쪽 문이 꽉 맞물려 열리지 않는 것을 확인한 효진이 천천히 손을 놓고 발을 떼었다. 

 

한 걸음 떨어져 유리벽을 가득 채운 감염자들을 보는 것은 너무 심한 시각적 자극이었다. 홀린 듯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며 서 있는 승준의 눈을 효진이 손을 뻗어 가렸다. 보지 마. 그가 이끄는 대로 바닥에 놓여 있는 긴 소파를 밀어 유리문 앞에 놓고 책장 속의 물건들을 바닥으로 빼냈다. 

 

몸보다 훨씬 큰 책장의 양쪽을 잡아 들고 소파 위에 올리자 유리문이 맨 위의 짧은 공간만 남겨두고 모두 가려졌다. 괴성을 지르며 문을 긁어대던 감염자들이 거짓말처럼 순간적으로 조용해졌다. 

 

두 사람은 숨죽인 채 벽 뒤에 숨어 그들이 목표물을 잊고 흩어지기만을 기다렸다. 너무 많은 인원이 몰린 탓에 완전히 사라지는 데까지도 시간이 오래 걸릴 터였다. 

 

짧은 시간에 너무 많은 체력을 소모해 효진은 금방이라도 탈진할 듯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은 채였다. 승준은 제 바로 앞에 등을 보이고 서 있는 효진의 하얀색 긴팔 티셔츠가 전부 젖어 몸에 달라붙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또 한번 효진이 제 목숨을 구한 것이다. 혼자 있었으면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도 하기 싫었다. 

 

그제야 승준은 무언가 깨달은 듯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건물 안에 감염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문을 막아둔 상태에서 공격당한다면 피할 길이 없었다. 물론 그랬다면 벌써 물어뜯기고도 남았을 테지만. 

 

다행히 어둠에 둘러싸인 실내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만 사람이 아니라 다른 것이 있었다. 

 

“……?”

 

얼굴을 찡그리고 어둠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안쪽 벽면에 철장으로 된 케이지들이 길게 늘어서 있고, 그 안에 강아지 한 마리가 갇혀 있었다. 기운이 없는지 눈을 감은 채 늘어져 있었지만 배 쪽이 조금씩 들썩거리는 걸로 보아 죽은 것 같지는 않았다. 

 

승준은 고개를 들어 실내를 천천히 살펴보았다. 여기가 어디지. 바닥을 내려다보니 조금 전 효진과 함께 책장에서 아무렇게나 빼낸 물건들이 어지럽게 흩어진 채 놓여 있었다. 반려동물용 사료와 캔, 장난감 같은 것들이었다. 상가 1층에 있는 동물병원인 듯했다. 

 

바깥의 감염자들이 거의 다 흩어졌다고 느꼈을 때, 승준은 최대한 위협적으로 인식되지 않기 위해 발소리를 죽여 조심스럽게 케이지 앞으로 다가갔다. 

 

“…어?”

 

그리고 뜻밖의 사실을 발견했다. 

 

“…효진, 일루 와 봐.”

“……?”

 

승준의 부름에 반사적으로 다가간 효진이 케이지 안의 강아지를 가리키는 손가락을 따라 조금 더 몸을 숙여 안을 들여다봤다. 

 

“…목화다.”

 

털이 하얗고 보송보송한 말티즈 하나가 누운 채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다. 기력이 없는 와중에도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기 시작하는 그 강아지는 당연하게도 효진 역시 잘 아는 얼굴이었다. MI엔터테인먼트 사장실에서 키우던 강아지. 

 

사장님 성이 목씨니까 목화 어때요? 애기가 딱 목화솜같이 생겼잖아요. 사장님 이하 경영진들이 다 모여 있는 회의 자리에서 넉살을 떨며 아이의 이름을 지어준 것도 승준이었다. 

 

“얘가 왜 여기 있지?”

 

너무 비현실적인 광경을 보고 난 다음이라 목화의 존재까지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바깥의 아비규환에 비해 눈앞의 작고 보드라운 생명체는 그 자체로 불가해한 기적 같았다. 승준은 저를 알아보고 꼬리를 파닥파닥 흔드는 목화를 케이지 밖으로 빼내 품에 꼭 안아 들었다. 힘도 없을 텐데 반가워해 주는 거 봐. 

 

“다행이다.”

 

그래도 병원에 와 있었구나. 그날 그대로 회사에 있었다면 지금쯤 어떻게 됐을지 짐작할 수 없었다. 이제 살아있는 사람이 아무도 남아있지 않을 건물이었다. 좀비가 강아지도 공격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무서워서 짖기라도 했으면 아마 표적이 되었을 것이다. 

 

다만 이곳에서도 며칠이나 방치돼 있었는지 케이지 안의 사료와 물그릇은 텅 비어 있었다. 언제부터 굶고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꽤 야위어 있는 것이 위험해 보이기까지 했다. 승준은 바닥에 굴러다니는 강아지용 습식 캔 하나를 뜯어 케이지 안에 있던 그릇에 담고 가방에서 꺼낸 생수를 물그릇에 부어 주었다. 

 

목화는 몸을 가누지 못하는 듯 늘어져 있다가, 음식 냄새를 맡고 조금씩 다가와 허겁지겁 그릇 안의 음식을 먹었다. 한입 먹을 때마다 눈에 띄게 기력을 찾아가는 것 같았다. 할짝이며 야무지게 물도 다 마신 목화는 아까 못다 반가워한 것을 계속하기로 했는지 힘겹게 꼬리를 흔들며 두 사람의 곁을 맴돌았다. 

 

우리가 여기 들어와서 다행이다. 안 그랬으면 얘 굶어 죽었을 거야. 아니 어떻게 딱 여기 목화가 있지? 승준이 신기하다는 듯한 얼굴로 목화를 안아 들고 소중하게 쓰다듬었다. 효진이 실내를 돌아다니며 동물병원 이름을 찾아내고 나서 기억을 더듬었다. 여기가 아마 회사에서 제일 가까운 동물병원이라 평소에도 여기 다닌다고 했었던 거 같아. 이름 보니까 기억이 난다. 사장실 앞에서 행정 업무를 하던 여자 직원이 목화를 캐리어에 넣어 자주 데리고 다녔었다. 

 

문 밖의 감염자들은 이제 완전히 사라졌는지 긁는 소리조차 거의 들리지 않았다. 비로소 마음을 놓고 있을 때, 병원 구석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저기…….”

“……으어?”

“……?!”

 

효진과 승준은 소스라치게 놀라 그 자리에서 같이 펄쩍 뛰었다. 반사적으로 전투태세를 갖춘 두 사람이 대걸레 자루를 들고 겨냥하자 하얀 의사가운을 입고 있는 남자가 두 손을 번쩍 들어 보였다. 

 

“나 좀비 아니야! 멀쩡한 사람이야.” 

 

어두워서 벽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벽과 같은 색의 문이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승준은 목화를 한 팔로 안고 다른 팔로 대걸레 자루를 꼭 쥐었다. 남자는 공격 의사가 없다는 것을 밝히려는 듯 계속해서 주절거렸다. 여긴 내 병원이고 나는 진료실에 갇혀 있었어. 키 크고 마른 남자는 좀비라고 해도 믿을 만큼 핼쑥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말을 하는 걸로 보아 확실히 감염자는 아닌 것 같았다. 

 

고, 공격하지 마. 더듬더듬 내뱉던 남자의 시선이 승준이 품에 안고 있는 강아지에게 잠시 머물렀다가, 조금 전까지 습식 사료가 담겨 있던 그릇으로 내려갔다. 

 

“너희… 혹시 먹을 거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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