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세상에서 이루어진 꿈에 관한 이야기 下 - 독
23-03-02 00:05

 

4.

 

두 사람(과 한 마리)은 남자가 숨어 있던 사무실 겸 진료실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승준의 백팩에서 꺼낸 죽과 에너지 바는 남자의 입 안으로 빠르게 들어가 자취를 감췄다. 

 

“아, 정말 굶어 죽는 줄 알았네.”

 

나흘째 물 말고는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는 남자는 사무실 뒤로 이어진 수술실로 들어가 승준이 갖고 있던 빈 페트병에 물을 가득 담아 왔다. 수술실은 만약을 위해 물탱크와 발전기를 따로 사용하고 있어서 물과 전기만큼은 아직 충분하다고 했다. 

 

“그런 의미에서 너희… 좀 씻을래?”

 

땀과 먼지에 잔뜩 절어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던 남자가 안쓰럽다는 듯한 얼굴로 수술실과 연결된 화장실 쪽을 가리켰다. 따뜻한 물로 대강 몸을 씻을 수 있다는 말에 효진과 승준은 마주보며 감격의 눈빛을 주고받았다. 감사합니다아…! 승준이 감동받은 얼굴로 말하자 남자는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더 고맙지. 생명의 은인들인데. 훈훈한 생존 아이템 교환의 현장이었다. 

 

승준이 씻으러 화장실로 들어간 사이 효진은 목화를 품에 안고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이 동물병원 원장이자 수의사이고, 엿새 전 첫 감염이 시작되었을 때 간호사들과 다른 직원들은 모두 감염되어 혼자 남았다고 했다. 사무실에 앉아 있다가 시끄러운 소리에 문을 열어 보니 난리가 나 있어서, 너무 무서워 그대로 문을 닫고 들어가 지금까지 한 발짝도 나오지 않았다고. 

 

“자체 발전기가 있다고 하셨죠?”

 

비상시에도 수술을 할 수 있도록 따로 마련해놓은 발전기라고 했다. 인터넷은 안 되지만 실내에서 조명을 켜거나 포트로 물을 끓일 수 있고, 충전이 가능하기에 핸드폰을 사용할 수도 있다고. 그건 아주 중대한 사건이었다. 남자가 혼자 고립되어 있는 동안 핸드폰을 이용해 모바일 TV를 보았다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효진이 반색하며 물었다. 뉴스 볼 수 있어요?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핸드폰을 책상 위에 세워 놓았다. 불안정하지만 신호가 잡힐 때마다 제법 선명한 영상이 화면 안에 떠올랐다. 때마침 승준이 흠뻑 젖은 머리를 하고 나오며 더없이 행복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따뜻한 물 너무 잘 나와 효진, 여기 완전 천국이야!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은 효진이 손짓으로 승준을 불러 옆자리에 앉혔다. 

 

“뭐야. 뉴스야?!”

“어.”

 

남자가 기대를 가득 품고 자리에 답삭 앉은 승준에게 손사래를 치며 대꾸했다. 근데 별로 특별한 건 없어. 매일 똑같은 말밖에 안 하거든. 감염이 점점 더 확산되고 있다, 치료제는 없다.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 아무 대책도 없어. 한껏 들떠 있던 승준의 표정이 금세 시무룩해졌다. 

 

“대피소는요?”

 

저희는 월드컵 경기장으로 가고 있었거든요. 거기가 임시 대피소라고 해서. 효진이 말하자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 그것도 매일 방송해줘, 대피소 목록. 근데 나도 거기까지 갈 방법이 없어서 못 가고 있지 뭐. 바로 코앞인데도. 나가자마자 좀비 떼한테 잡힐 게 분명하잖아. 

 

그 말에는 효진도 동의했다. 이번에는 운 좋게 잠시 피해 있을 곳을 발견했다지만 다음번엔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었다. 건물 사이로 아무리 몸을 잘 숨겨 이동한다고 해도 큰길 쪽에 몰려 있는 압도적인 수의 감염자들에게 들키고 나면 되돌릴 수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이 건물 옥상으로 헬기가 온다면 모를까.”

 

전화도 인터넷도 안 되는 마당에 구조대를 불러 헬기가 오도록 하는 게 가능할까. 효진이 어두워진 얼굴을 하고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씻고 나왔을 때에도 남자와 승준은 책상 위에 세워둔 핸드폰으로 계속 뉴스를 보고 있었다. 짐짓 심각해 보이는 승준의 얼굴에 효진도 물기를 닦으며 옆에 앉아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아까 보았던 영상이 다시 재생되고 있었다. 몇 시간 동안 뉴스는 녹화해놓은 것처럼 같은 소식만 전하고 있었다. 남자가 말한 대로 새로운 정보랄 것이 없는 것 같았다. 

 

-

 

효진과 승준의 잠자리는 수술실 바닥에 마련되었다. 남자는 책상 앞 의자에서 자는 게 편하다며 둘만 있을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해주었다. 가벼운 탈수 증상이 있던 목화는 다행히 건강에 큰 이상이 없어 수액을 맞고 효진과 승준의 사이에서 웅크린 채 잠들어 있었다. 

 

누운 채로 승준이 졸린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이렇게 좋은 사람 만나서 다행이다. 목화랑도 만나구. 죽으라는 법은 없나 봐, 사람이든 강아지든. 효진이 그러게, 하고 대꾸했다. 

 

원체 친화력이 좋은 승준은 오랜만에 새로운 사람을 만나 기뻐하고 있는 듯했다. 물론 저는 낯선 사람에게 하루 만에 경계를 풀 정도로 친화적인 성격은 못 되었다. 하지만 승준의 들떠 있는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아, 사실 자리에 눕기 전에 가방에서 접이식 과도를 꺼내 품에 넣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불 꺼진 수술실 바닥에 누워 있을 때 문득 작은 체온이 닿아 왔다. 승준의 손이 효진의 손가락 사이 빈 공간을 파고들어와 확연한 온기가 전달되도록 꽉 잡아 주고 있었다. 그 순간 등줄기를 타고 오른 아찔한 감각을 효진은 최선을 다해 티 내지 않으려 숨을 삼켰다. 

 

“끝까지 포기하지 말자. 효진.”

“…….”

“다 잘될 거야.”

 

익숙한, 이승준만의 위로 방식이었다. 오늘 하루 제가 목표로 한 일이 또다시 실패한 것에 대해서 마음 써 주고 있는 거였다. 살며시 손잡아주고 격려해주고 잘될 거라고 말해주는 건, 김효진이 부담을 지고 움츠려 있을 때마다 전달되는 이승준의 전매특허 묘약이였다. 자신이 그럴 때마다 얼마나 커다란 힘을 얻는지 아마 그는 말해도 모를 터였다. 

 

효진은 제 손안에 느껴지는 간지러운 감촉에 전율하며 힘주어 움켜잡았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모든 것이 송두리째 뒤흔들리고 있는 이 불안정한 세상에서 이렇게까지 기쁨을 느껴도 되는 걸까. 하지만 감정은 흔들리지 않고 여기에 존재했다. 세상 모든 것이 변하고 뒤집히는 와중에 지금 느끼는 이 행복만이 굳건했다. 

 

입 밖으로 내고 싶은 말들은 넘칠 만큼 많았다. 그러나 아무 말 없이 손잡은 채로, 두 사람은 그저 반듯이 누워 밤을 지새웠다. 

 

-

 

다음 날 낮, 두 사람은 상가 건물을 통해 이어진 계단을 올라 옥상으로 향했다. 십 층이나 걸어 올라가야 해서 보통 힘든 게 아니었다. 

 

“제대로 먹은 것도 없는데 운동을 너무 제대로 하네.”

 

승준이 헥헥거리며 힘겹게 다리를 들어 올렸다. 효진도 오만상을 하고 무릎에 손을 얹었다. 아닌 게 아니라 편의점에서 챙겨온 식량도 이제 조금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먹는 입이 갑자기 하나 더 늘어난 탓이었다. 그래도 덕분에 따뜻한 물과 전기와 화장실이 있는 쾌적한 환경에서 지내고 있는 터라 값은 지불받은 셈이었다. 

 

옥상 위에서 내려다보니 몰려 있는 감염자들의 수가 훨씬 확연히 가늠되었다. 최소 수백 명. 백여 명 정도의 무리 여러 개가 가까운 곳에 뭉쳐 어슬렁거리고 있다. 도보로 저 중간을 뚫고 나간다는 건 불가능했다. 월드컵경기장은 그야말로 지척이었다. 과장 조금 보태어 손만 뻗으면 잡힐 듯한 거리에 거대한 외벽이 솟아 있었다. 

 

조금만 더 가면 대피소가 있는데 이렇게 가까운 곳에 발이 묶여 갇혀 있다니. 밖을 내다볼수록 답답한 마음만이 턱턱 차올랐다. 

 

모바일 TV 전파는 밖에서 더 잘 잡혔다. 옥상으로 남자의 핸드폰을 들고 올라온 것도 그 때문이었다. 효진히 전파 수신이 가장 잘 되는 장소를 찾기 위해 옥상 위를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손안에서 똑같은 소식만 반복해 들려주던 뉴스가 특보를 전달한 것은 그 때였다. 

 

“……승준아.”

 

옥상 난간에서 감염자 무리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던 승준이 몸을 돌렸다. 효진의 눈이 핸드폰 화면을 뚫어질 듯 바라보고 있었다. 뭔데? 다가가며 물어도 대답은 없었다. 효진이 보고 있는 화면 안의 인물을 스치듯 본 승준이 눈을 크게 뜨고 놀란 듯 외쳤다. 

 

“뭐야, 이게?”

“…….”

“…우리 대표님이잖아.”

 

화면 안에는 익숙한 인물과 장소가 번갈아 나오고 있었다. 그 아래로 자막이 떠올랐다. 

 

[“서울시 대규모 감염병 사태 근원” 희원동 M엔터테인먼트 대표 목 씨 자수]

 

“…….”

“…….”

“……이게 무슨 소리야?”

 

두 사람은 충격에 빠져 핸드폰 화면만 말없이 들여다보았다. 익숙한 실루엣의 중년 남자가 경찰로 보이는 사람들에 의해 재킷으로 얼굴이 가려진 채 연행되고 있었다. 

 

아무리 보아도 대표님이 분명했다. 지난 몇 년간 회사에서 질리도록 보아 온 생김새였다. 효진이 볼륨 키를 눌러 소리를 더 키웠다. 화면 안에서 아나운서가 흥분을 숨기지 못하는 듯한 격양된 목소리로 사건의 진상을 늘어놓고 있었다. 

 

[희원동 소재 M엔터테인먼트 대표 목 씨는 오늘 오후 대책본부를 찾아, 자신의 회사 소속 아이돌 연습생에게 투약할 용도로 불법 신체강화제를 밀매해 생체실험을 한 것이 이번 감염병 사태의 원인이라고 자백했습니다.]

 

뭐?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현실을 조금 더 또렷이 바라보라는 듯 조금 전보다 전파가 잘 잡혀 화면은 더욱 선명해졌다. 승준이 옥상 한가운데 선 채로 효진의 어깨를 꽉 움켜잡았다. 

 

[해당 신체강화제는 복용 시 체력과 근력이 강화되며 특히 성대가 단련된다는 검증되지 않은 효능으로 암시장에 유통되고 있던 약물로서, 목 씨는 자신의 회사에서 발표할 예정인 아이돌 그룹 멤버들의 트레이닝 시간을 단축시키기 위해 해당 약물을 구입했다고 밝혔습니다.]

 

“…….”

“…….”

 

더 놀라운 소식은 그 뒤에 이어졌다. 

 

[전문가들은 목 씨가 효능 검증을 위해 해당 약물을 자신이 키우던 강아지에게 투약하는 과정에서 박테리아의 변이가 일어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순간 두 사람은 약속한 듯이 고개를 돌려 서로를 바라보았다. 말하지 않아도 수면 아래에 숨겨진 진실을 저절로 깨달을 수 있었다. 

 

“…섣불리 움직이면 안 돼.”

 

냉정한 얼굴이 된 효진이 당장이라도 목화를 데리러 내려가려는 승준의 어깨를 잡아 세웠다. 

 

“이건 기회가 될 수 있어.”

 

-

 

삼십 분 후, 진료실 의자에 앉은 남자는 케이블 선에 감겨 등 뒤로 손을 꽁꽁 묶인 채 속박되어 있었다. 

 

진료하러 온 반려동물의 보호자처럼 그의 앞에 앉은 승준이 핸드폰을 가져다 남자의 눈앞에 뉴스 화면을 들이밀었다. 

 

“아는 내용이에요?”

 

뉴스에서는 몇 번이고 반복하여 희원동 M엔터테인먼트 대표의 불법 약물 실험에 대해 전달하고 있었다. 답은 듣지 않아도 뻔했다. 생체 실험을 당한 강아지가 병원에 있는데 담당 수의사가 모르고 있을 리 없었다. 어디서부터 가담했어요? 냉랭한 기운이 묻어나는 말투로 승준이 추궁했다. 의자 뒤에서 효진이 케이블 선을 단단히 잡고 날붙이를 남자의 목에 가까이 붙였다.

 

- 협박을 하자구? 

- 지금 뉴스를 알고 있는 게 우리뿐이니까. 

 

막 터진 속보였다. 핸드폰이 한 대 더 있지 않은 이상 남자는 이 사실을 모를 터였다. 사장이 자수를 했다는 걸 알면 공범인 자신의 안위를 위해 공격적으로 나올 위험이 있었다. 

 

- 내려가서 아무렇지 않은 척하다가, 제압해서 묶어 놓자. 

 

그 결과가 지금의 모양새였다. 효진은 제가 제안해 놓고도 누군가를 묶어놓고 협박하는 게 이렇게 순조로울 거라고는 예상 못 했다. 하지만 한 호흡처럼 움직이는 성인 남자 두 명이 작정하고 협력하면 그 정도는 식은 죽 먹기였다. 

 

남자가 황당하다는 듯한 얼굴로 화면 안을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자수를 했다고? 이 새끼 제정신이야? 승준이 경멸과 배신감이 담긴 눈으로 남자를 올려다봤다. 어디서부터 연관되어 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 한 마디로 공범인 것은 분명해졌다. 자백하셨네. 허탈한 듯한 승준의 중얼거림에도 남자는 아랑곳없이 빈정거리는 말투로 화면 속 남자―대표님―를 비난해댔다. 아니, 지 입만 다물면 아무도 모르는 세상이 됐는데 얼어 죽을 자수는 씨발. 

 

승준이 질린 듯한 얼굴로 효진과 눈짓을 주고받았다. 

 

“나는 돈만 받은 거야.”

 

신체강화제인지 뭔지 이상한 약을 구해온 것도, 강아지한테 주사한 것도 저 새끼가 알아서 한 일이라고. 남자가 목청을 높이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물론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는 말이었다. 남자의 시선이 어지럽게 돌아다니며 무언가를 찾았다. 그 개, 개 어딨어. 의자에 묶여 움직이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위협을 느낀 승준이 진료실 구석에 앉아있는 목화를 찾아 품에 안아 들었다. 

 

“그래 그 개. 쟤가 갑자기 난폭해져서 자기 직원들이 몇 명 물렸다고 하더라고.”

 

그러더니 돈을 주는 거야. 사실은 자기가 이 강아지한테 불법 약물을 주사했는데, 이게 그 부작용인 거 같으니까 차트에는 쓰지 말아 달라고.

 

“그게 다야. 아무 일도 아니었다고. 중요한 고객한테 서비스로도 해줄 수 있는 일이었어.”

 

그렇잖아? 케이지로 옮기는 과정에서 쟤한테 우리 직원도 몇 명 물렸는데 멀쩡했다고, 그때는. 말이 이어질수록 남자의 어조가 초조해졌다. 그날의 악몽이 되살아난 것인지, 자기가 지은 죄의 무게를 느끼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효진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고 남자의 말에서 걸러낼 수 있는 정보를 취합했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아마 초반에는 변이가 그렇게까지 빠르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점심시간쯤이 되자 상황이 달라졌다. 목화에게 물린 직원들이 쓰러져 발작을 일으키기 시작한 것이다. 다시 일어났을 때 그들은 눈 전체가 새까만 괴물이 되어 보호자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남자는 필사적으로 개인 진료실로 달려 들어가 문을 닫고 숨었다. 병원 안의 사람들이 모두 괴물이 되어 밖으로 나갔는지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을 때까지 책상 밑으로 들어가 숨을 죽였다. 

 

“나는 쟤가 이미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어.” 

 

남자가 힐긋 목화를 넘겨다봤다. 뉴스에서도 그랬잖아, 감염되면 최대 한 시간 이내에 사망한다고.

 

그런데 엿새가 지나 누군가 들어온 듯한 말소리가 들려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고 나가 보니, 그 강아지가 멀쩡히 살아 승준의 품에 안겨 있었다. 

 

“감염을 이겨냈다는 거고, 그럼 항체가 있겠지.”

 

그래서 목화에게 수액을 맞힌다는 핑계로 피를 뽑아 혈청을 만들었다. 여기까지 말했을 때 효진이 케이블 선의 매듭을 빠듯하게 조이며 남자에게 다가붙었다. 

 

“백신을 만들었다는 거야?”

 

남자가 어림없다는 듯이 웃었다. 

 

“겨우 그 정도로 백신이 되진 않아. 치료제라고도 할 수 없어. 하지만 지금 상황에선 내 보험이 하나라도 있어야 하잖아?”

 

애초에 동물과 사람은 다르다. 혈청을 주입한다고 해도 어떤 반응이 일어날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효진이 입술을 잘근 깨물며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승준은 다른 의미로 충격 받아 목화의 머리를 연신 쓰다듬고 있었다. 안 그래도 아픈 애한테서 피까지 뽑았다니. 저 악랄한 사람 같으니라고. 목화야 고생했어… 목화야 고마워…. 

 

“어디 있어, 그 혈청.”

 

목에 날붙이가 들이밀어지는 것을 느낀 남자가 굳은 표정을 하고 턱짓으로 수술실 쪽을 가리켰다. 효진과 승준이 편의점에서 가지고 온 음식들을 보관하고 있는 수술실 안의 작은 냉장고. 그 안에 조그만 주사약 병 하나가 놓여 있었다. 

 

건물 밖에서 투두두두두, 하는 소리가 들렸다. 프로펠러 소리였다. 효진과 승준이 재빨리 눈짓을 주고받았다. 

 

옥상에서 뉴스를 볼 때부터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다. 범인이 자수했으니 공범의 신원을 말할 테고, 박테리아 변이의 시발점인 목화도 찾으러 올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자신들의 예상보다도 훨씬 더 빨랐다. 

 

이렇게 빨리 움직일 수 있으면서 생존자는 왜 안 찾아다니는 거야? 순간 화가 치밀었으나 어쨌든 살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왔으니 감사히 생각해야 했다. 승준이 목화를 재빨리 캐리어에 넣는 사이 효진은 냉장고에서 남자가 말한 주사약 병을 주머니에 넣었다. 

 

옥상에 착륙한 헬기에서 무장한 군사경찰들이 총을 들고 일제히 내렸다. 계단을 타고 1층으로 내려온 군인들은 동물병원 안으로 진입하자마자 활짝 열린 진료실 문 앞에 서 있는 조그만 체구의 남자 둘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들은 두 손을 얼굴 옆으로 가만히 들어 올린 채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저희를 맞이했다. 

 

승준이 바짝 들고 있던 두 손에서 검지만 남기고 손을 눕혀 진료실 안을 가리켰다. 

 

그 손짓에 검은 전투 복장의 인원들이 우르르 진료실 안으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긴 케이블 선으로 의자에 꽁꽁 묶여 진땀을 흘리고 있는 용의자가 있었다. 군인들이 서로 바라보며 어리둥절해 있는 사이 승준이 발치에 둔 캐리어를 들고 진료실 안으로 들어왔다. 찾으시는 강아지는 얘예요. 목화. 

 

“안전할 거라고 약속해 주시면 건네 드릴게요.” 

 

군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승준은 결연한 표정을 하고 그들에게 캐리어를 건넸다. 

 

군인들의 엄호를 받으며 효진과 승준, 그리고 케이블에 묶인 채인 남자가 계단을 통해 옥상으로 올라갔다. 총을 들고 특수 임무를 수행 중인 군인들의 진지한 태도에 말 한 마디 섣불리 할 수 없었으나 승준은 생각했다. 하루에 두 번이나 여기를 올라가는 건 너무 지독한 운동이야. 

 

옥상 문을 열자 헬기 두 대가 상공에 뜬 채 기다리고 있었다. 프로펠러의 바람이 자욱한 먼지를 만들었다. 세 사람에게 헬기 위로 올려 보내기 위한 안전장비를 장착시키기 위해 군인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그 때. 

 

남자를 연행하던 군인이 그의 몸과 손목에 묶여있던 케이블 선을 끊어낸 순간, 소매 안쪽에 숨겨두었던 주사기를 꺼낸 남자가 군인의 팔목 사이 맨살에 약을 찔러 넣었다. 

 

-

 

옥상 위는 순식간에 아비규환이 되었다. 남자가 찔러 넣은 것은 목화가 처음 감염되었을 때 뽑은 피로 만든 감염약이었다. 그 자리에 쓰러져 경련하다 다시 일어선 군인은 저를 내려다보고 있던 동료 군인에게 달려들어 마구잡이로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으아악! 물린 군인의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시작으로 혈투가 벌어졌다. 훈련받은 신체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감염되자 힘과 속도가 말도 안 되게 증가해 총을 갖고 있는 군인도 쉽게 제압하기 힘들어진 탓이었다. 게다가 동료를 쏘는 일은 누구라도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 사이 이 모든 일의 근원인 남자는 소매에 숨겨 두었던 다른 주사기를 꺼내 자기 자신에게 주사했다. 따로 챙겨 두었던 면역 혈청이었다. 주사기를 팔뚝에 다 찔러 넣은 순간 군인 감염자가 남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어깨를 물어뜯기고도 남자는 믿을 구석이 있다는 듯 침착하게 옥상 구석으로 피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무섭게 경련하는 몸을 바닥에 내뻗었다. 

 

혈청은 도움이 되지 않았다. 허무하게 ‘좀비화’하는 자신을 느끼며 남자는 마지막으로 중얼거렸다. 이런 씨발, 내 돈. 

 

효진과 승준은 아직 안전장비를 몸에 다 두르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시간이 없었다. 이대로는 남은 인원이 모두 전멸할 기세였다. 두 사람을 안내하던 군인이 다급하게 무전을 취하자 헬기가 옥상 위로 좀 더 가까이 다가와 붙었다. 

 

헬기에서 던진 비상용 사다리가 효진의 눈앞으로 출렁거리며 내려왔다. 아직 감염되지 않은 군인들이 제 동료들을 향해 총을 쏘는 동안 두 사람은 빠르게 사다리 위로 매달렸다. 

 

“잠깐만요!”

 

옥상 바닥에 목화가 든 캐리어가 놓여 있었다. 담당 군인이 감염자들을 상대하느라 미처 챙기지 못한 것 같았다. 승준은 날렵하게 사다리에서 내려와 캐리어를 향해 달려갔다. 

 

“이승준!”

 

헬기 안에 올라탄 효진이 다급한 목소리로 승준을 불렀다. 빠른 움직임으로 캐리어를 확보한 승준이 다시 사다리를 붙잡고 올라가려는 순간 바닥에 쓰러져 있던 군인 하나가 달려들어 승준의 발목을 잡아챘다. 

 

승준은 필사적으로 발로 차서 군인을 떨어뜨리려 했다. 하지만 방탄모까지 쓴 큰 체격의 남자를 한쪽 발로 떨어뜨리기란 좀처럼 쉽지 않았다. 승준에게서 목화를 받아 올린 효진이 헬기 밖으로 상체를 내밀어 승준을 필사적으로 붙잡고 끌어올렸다. 헬기 안에 타 있던 군인이 목화가 든 캐리어를 안전하게 위치시킨 뒤 승준에게 매달려 있는 군인을 총으로 쏴 떨어뜨렸다. 

 

승준이 가까스로 사다리를 타고 헬기 안으로 올라온 순간 쿠당, 하고 문이 닫혔다. 

 

효진이 안도감에 눈을 질끈 감고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대로 승준을 놓쳐 버리는 줄 알았다. 어깨를 잡고 끌어올리던 두 손이 덜덜 떨렸다. 그러나 효진이 길게 한숨을 내쉬는 사이 승준이 숨을 몰아쉬며 이상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입고 있는 바람막이 지퍼를 목 끝까지 올리고 양쪽 소매에서 팔을 빼내는 중이었다. 

 

“……너 뭐 해?”

“효진.”

 

몸을 뒤로 하고 제 겉옷 소매를 헬기 좌석에 묶고 있는 승준을 돌아보며 효진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다시 상체를 앞으로 향한 승준이 두 팔을 옷 안으로 들이고 단단히 팔짱을 낀 다음 효진을 돌아보았다. 

 

“좋아해.”

“……어?”

“마지막으로 고백은 꼭 하고 싶어서.”

 

무슨 소리야. 마지막이라니. 효진이 혼란스러워 하는 동안 승준이 다리를 올려 제 발목을 보여 주었다. 물린 잇자국이 선명했다. 

 

“너……!”

“저 변하면 바로 쏴주세요. 최대한 신속하게.”

 

승준이 마주 앉은 군인에게 말하자 그가 아무 말 없이 승준에게로 총을 겨누었다. 패닉이 된 효진이 황급히 주머니를 뒤져 혈청이 담긴 주사약 병을 꺼냈다. 효진은 옷 속에서 팔짱을 끼고 있는 승준의 손을 억지로 옷 아래로 꺼내 황급히 손바닥에 감긴 붕대를 풀어냈다. 승준이 그 모습을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소용없어. 아까 그 남자 변하는 거 봤잖아.”

“걔는 팔에 주사하고 어깨를 물렸잖아.”

 

물린 부위가 뇌에 가까울수록 빨리 변이된다는 건 발목 부위라면 아직 뇌까지 도달하는 데 시간이 남았을지도 모른다는 뜻이었다. 여기가 머리에서 더 가까운 부위니까 가능성이 있을지도 몰라. 붕대를 다 풀어낸 효진이 손바닥에 난 찢어진 상처 위로 혈청을 들이부었다. 적은 양의 노란 액체가 제대로 아물지 못해 살 안이 들여다보이는 상처 안으로 조금씩 스며들었다. 

 

실제로 아직 승준은 변이하지 않았다. 괜찮을 거야. 괜찮아. 효진이 떨리는 팔을 들어 와락 승준을 끌어안았다. 헬기가 프로펠러를 힘차게 돌리며 상공에 떠 이동했다. 시끄러운 소음 사이로 귓가에 승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효진!

 

“끝까지 포기하지 마!”

“뭐라고?”

“너, 데뷔할 수 있어!”

 

얘가 이 와중에 무슨 소릴 하는 거야. 효진의 얼굴이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양어깨를 잡고 바라본 승준의 얼굴은 슬프게 보였으나 동시에 언제나 그렇듯이 해맑아 보였다. 효진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검증되지도 않은 불안정한 주사약 하나에 기대하기에 현실은 너무 잔인했다. 우는 얼굴로 아랫입술을 잘근 깨문 효진이 승준에게 다가가 기습적으로 입을 맞췄다. 

 

“그러니까 할 수 있… 읍!”

 

말을 잇던 승준이 갑작스런 키스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곤 곧 상황을 깨닫고 필사적으로 효진을 떼어냈다. 

 

“무슨 짓이야!”

 

미쳤어 너? 왜 제게 키스했는지를 묻는 것이 아니었다. 효진의 입술에서 피가 나고 있었다. 입술이 찢어졌으니 꼼짝없이 타액이 들어갔을 것이다. 승준이 상처 난 손바닥으로 효진의 팔을 힘주어 때렸다. 미친놈아 뭐 하는 거야, 정신 나갔냐구!

 

효진은 대답하지 않고 맞은편의 군인을 향해 외쳤다. 저도 변하면 바로 쏴주세요. 눈앞에서 젊은 청년 둘의 애정행각을 목격하고도 군인은 동요가 없어 보였다. 어쩌면 속으로는 놀라고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효진이 승준을 당겨 품에 꽉 끌어안고 귓가에 속삭였다. 

 

“운명공동체잖아.”

“…….”

“이제 어쩔 수 없어. 변하든 아니든 끝까지 같이 있는 거야.”

 

그렇게 말하며 효진은 행복한 얼굴을 했다. 이제 엉망으로 우는 것은 승준 쪽이었다. 엉엉 울음소리를 내며 오열하는 승준의 몸을 조금 더 세게 끌어안은 효진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내뱉었다. 나도야. 이승준. 

 

“나도, 너 없이는 다 의미가 없어.”

 

그 밤, 좁은 컨테이너 박스 안에서 나란히 누워 했던 말에 대한 대답이었다. 몸을 떼어 바라본 승준은 눈가가 빨갛게 된 채 온 얼굴을 찡그리고 울고 있었다. 눈물이 너무 많이 흘러내려 두 볼이 반짝거렸다. 

 

너무 예뻤다. 효진은 참지 못하고 다시 승준을 끌어당겨 깊게 키스했다. 

 

 

 

 

 

5.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미확인 감염병은 치료제와 백신 개발 이후 조금씩 잦아들어 대부분 자취를 감추었다. 감염된 후 한 시간을 넘긴 사람들은 살릴 수 없었지만 새로 감염된 사람은 변이가 끝나기 전에 치료제를 주사하면 살 수 있었다. 백신이 보급된 후로는 집단 면역이 형성되어 물려도 감염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목화 덕분이었다. 첫 감염을 이겨낸 작은 강아지는 수천만 명의 목숨을 살려낸 백신 개발의 근원적인 역할을 했다. 

 

그날 헬기에서 효진과 승준은 끌어안은 채로 사이좋게 정신을 잃었다. 신체 변이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깨어나기까지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효진이 의식을 찾은 것은 꼬박 일주일이 지난 후였다. 가족들이 무균실 유리벽 밖에서 저를 바라보며 안도의 눈물을 흘리는 것을 찡한 마음으로 바라보면서도 그는 승준의 안위에 대한 걱정뿐이었다. 

 

승준은 깨어나지 않았다. 며칠이 지나도, 몇 달이 지나도, 일 년이 지나도 그대로였다. 의식을 잃은 채 기계에 연결되어 숨만 쉬고 있을 뿐이었다. 

 

매일같이 그의 옆을 지키고 있는 승준의 가족들에게 면목이 없었다. 제가 끝까지 지켜냈어야 했는데. 그날 헬기에 먼저 오르는 게 아니었는데. 그러나 후회해도 소용없었다. 지난 일은 되돌릴 수 없었다. 

 

다시 연습생을 하는 대신 효진은 승준을 깨어나게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찾아다녔다. 2년이 지나고 3년이 지나고, 5년째가 되자 가족들은 이제 승준을 놓아주자고 말했다. 하지만 효진은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마지막 순간 저와 입 맞추던 작은 숨결이 아직도 제 몸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특수한 상황이잖아요. 다른 연구 결과가 나올지도 모르잖아요. 그런 말들로 끈질기게 그의 가족들을 설득했다. 하지만 살아남아있는 사람들을 제 이기심으로 인해 고통 받게 하고 있다는 죄책감이 끊임없이 효진을 괴롭혔다. 일 년만 더, 몇 개월만 더. 며칠만 더. 

 

그렇게 6년이 지났다. 

 

세상은 완전히 변해 버렸으나 세월은 변함없이 흘렀다. 그 날은 두 사람이 만난 지 16년째 되는 날이었다. 효진은 화사한 색의 봄 코트를 차려입고 꽃을 든 채 승준이 있는 병실로 향했다. 특별한 날이니까 기념하는 기분을 내고 싶었다.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평소와 다름없이 눈을 감고 누운 승준이 저를 맞이했다. 

 

“날씨 좋다 그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효진은 사들고 온 꽃을 창가에 둔 꽃병에 꽂으며 익숙하게 말을 건넸다. 혼잣말이었으나 언제나 승준이 듣고 있을 거라 믿었다. 

 

“오늘 무슨 날인지 알아? 우리 만난 지….”

 

평소보다 조금 들뜬 어조로 내뱉으며 뒤를 돌아본 효진의 눈이 크게 뜨였다. 승준이 침대에 누운 채로 가만히 눈을 떠 효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

 

너무 놀라 굳어 서 있는 효진을 바라보던 승준의 얇은 입술 새로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효진.”

 

그 한 마디를 듣고 싶어서. 네가 불러주는 내 이름이 듣고 싶어서 놓을 수가 없었어. 효진은 와락 얼굴을 구기며 우는 얼굴을 하고 승준을 향해 다가갔다. 야윈 어깨를 품에 안았을 때 등 뒤로 나뭇가지 같은 손이 저를 마주 안아오는 것을 느꼈다. 

 

효진은 차오르는 벅찬 숨을 그대로 내뱉으며 울먹였다. 승준아. 네가 말한 대로 나 꿈 포기 안 했어. 포기할 수가 없었어. 생각해 보면 십육 년 전에도, 육 년 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내 꿈은 항상 똑같았거든. 

 

그리고 오늘, 효진은 제가 품은 평생의 꿈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았다. 

 

 

 

 

 

END.

 

 

 

 

 

독 @do__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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